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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사랑은 노동

모이라 와이글 지음 | 김현지 옮김 | arte | 468쪽 | 3만8000원

사랑에 대한 낭만주의적 통념에 따르면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고 연애는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사랑은 노동>은 사랑에 대한 온갖 담론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는 이 같은 낭만주의적 연애관을 거부한다. 저자인 모이라 와이글 하버드대학교 비교문학과 교수에 따르면 “결혼이 연애 시장에 뛰어든 모두가 바라는 장기 계약직이라면, 데이트는 가장 불안정한 형태의 무급 인턴십이다.”

이미지컷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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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사랑은 낭만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변수들이 개입하는 노동’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데이트가 발명된 190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 데이트 문화의 변모를 살핀다.

데이트는 1900년 무렵 발명됐다. “수컷 푸른발얼가니새는 초라한 짝짓기 춤을 추지만 데이트는 하지 않는다. 1900년 무렵까지는 미국인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전까지 미국 중산층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애 행위는 남성이 여성의 집에서 그 여성의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만남을 갖는 행위였다. 여성의 어머니는 딸이 16세쯤 됐을 때 주중 하루를 정해 사윗감 후보들을 초대했다. 사교 모임에서 만난 남성을 여성이 부모의 허락을 받고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1880년대부터 농촌 여성들이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나면서 이 같은 데이트 문화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도시로 간 농촌 여성들은 공장 생산직 노동자, 백화점 판매원, 부잣집 가정부, 사무실 비서, 레스토랑이나 세탁소 직원 등 다양한 직종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1900년 무렵 미국 여성의 절반 이상이 직장에서 일을 했다. 이들이 살던 집에는 ‘사생활’을 위한 공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데이트는 ‘밖’에서 이뤄졌다. 1896년 조지 에이드라는 작가의 글에서 ‘데이트(date)’라는 말이 처음으로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이처럼 남녀가 밖에서 만나게 된 사정과 관련이 있다.다. 글 속의 주인공은 여자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따진다. “다른 녀석이 내 데이트 날짜를 다 채우고 있는 것 같군?”

사랑이 노동이라면…“결혼은 장기 계약직, 데이트는 무급 인턴십”[플랫]

남녀가 집이 아닌 밖에서 만나 구애한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그 변화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1900년대 초 미국의 풍기문란죄 단속 위원회가 레스토랑, 댄스홀, 극장 등 데이트 장소에 경찰을 보내 감시할 정도였다. 주목할 점은 주로 여성들이 체포됐다는 점이다. “당국의 눈에는 남자에게 먹고 마실 것, 혹은 선물과 입장권을 사도록 하는 여자는 성매매 여성으로 보였고 데이트를 하는 것은 성매매를 하는 것과 같았다.”

처음에는 노동자 계층 남녀들의 데이트 문화를 꺼림칙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중산층도 1910년대로 접어들면서 데이트를 합법적 구애 형태로 받아들이게 됐다.

데이트의 보편화는 사랑이 ‘시장’에서 거래 가능한 상품이 됐음을 뜻한다. “구애를 집 밖으로 끌어내 시장으로 가져옴으로써 데이트는 수익성 좋은 사업이 됐다. 데이트라는 관행은 결코 채울 수 없는, 성, 관심, 애정에 대한 인간의 기본 욕구를 잠재적으로 무한한 수요의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했다.”

미국 데이트 문화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요소는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교육의 확산이다. 1910년 무렵 도시에서 고등학교 진학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1920년 미국 대학생 숫자는 1890년보다 세 배 늘어났다.

자녀수가 줄어들면서 이전 세대보다 덜 엄격한 부모에게서 자란 1920년대 이후 미국 고등학생들은 데이트에 열을 올렸다. 데이트 문화 확산에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남녀공학 대학의 확산이다. 1927년이 되면서 대부분의 대학이 공학으로 전환됐다. 미국 대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학생들이 학교 밖 거주지에서 이성과 동거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성 간 기숙사 방문과 관련해서도 시시콜콜한 규정을 적용했으나, 1960년대 말 히피 문화가 대학가를 휩쓸면서 사실상 손을 들었다.

2000년대 이후 미국에서 데이트는 “선별적 짝짓기”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1980년대까지는 남성 관리자가 여성 판매원과, 남성 상사가 여성 비서와, 혹은 남성 의사가 여성 간호사와 결혼하는” 계급 교차적 관계가 가능했으나 지금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1960년에는 대졸 남성의 25퍼센트만이 대졸 여성과 결혼했지만, 2005년에는 그 비율이 48퍼센트였다. (중략) 선별적 짝짓기 양상은 미국 가계들 사이에 커져 가는 경제적 불평등을 증폭시키면서 스스로 강화됐다.”

온라인 데이팅 앱의 부상은 데이트에서 ‘취향’의 영향력을 크게 강화했다. 온라인 앱의 프로필은 사용자의 취향을 가장 눈에 띄게 전시한다.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유명한 대사처럼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뭘 좋아하느냐”인 것이다.

데이트에서 낭만적 요소를 걷어내는 일이 사랑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과제는 구태의연한 모형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사랑을 올바르게 존중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책은 ‘산업혁명부터 데이팅 앱까지, 데이트의 사회문화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논의의 범위가 20세기 미국으로 한정돼 있다.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 상당 부분이 한국 독자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것 같다.

▼ 정원식 기자 bachwsik@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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