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 사진을 찍기에 좋은 명소로 알려진 프랑스 파리의 트로카데로 광장 한쪽에는 ‘절대빈곤 퇴치 운동 기념비’가 있다. 1987년 10월17일 이곳에 운집한 10만명이 빈곤은 단지 결핍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권리의 침해임을 선언하며 기념비 제막식을 열었다. 5년이 지난 1992년, 유엔은 이날을 ‘빈곤 퇴치의 날’로 정했다.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갱신하며 살고 있지만 빈곤과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성장이 모두의 풍요를 가져올 것이라는 약속은 깨진 지 오래고, 불평등의 골은 오히려 깊어지고 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전후 극심한 빈곤을 겪던 나라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외환위기 등과 같은 경제위기가 없더라도 약 15% 내외의 빈곤을 꾸준히 발생시키는 사회가 되었다. 최상위 1%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8.4%에서 2021년 11.7%로 증가했고, 상위 20%와 하위 20%의 부동산 자산 배율은 2011년 77배에서 2022년 141배로 늘어났다.
미국의 사회학자 매슈 데이먼드는 ‘풍요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풍요 때문에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한 사회가 돈을 버는 방식은 누군가에게 빈곤을 안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싸게 부려 먹는 행태, 가난한 이들일수록 소득 대비 너무 비싼 임대료를 부담하는 현실, 아파도 병원 가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값비싼 의료비로 누군가는 돈을 벌고, 누군가는 가난에 빠진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가난’이 아니라 ‘미국이 만든 가난’이라고 불러야 적절하다고 말한 그의 의견에 따르면, 우리 역시 ‘한국이 만든 가난’으로 불러야 한다. 한 사회가 이윤을 만드는 방식이 빈곤을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빈곤사회연대는 매년 10월17일을 기념하여 집회와 행진을 연다. 그리고 바로 지금 주목해야 할 빈곤 문제, 즉 빈곤을 만들고 영속시키는 우리 사회에 대해 말한다.
2024년 우리가 밑줄을 그어야 할 빈곤 문제는 무엇인가? 입만 열면 ‘약자 복지’를 말하면서 복지의 근간을 파괴하는 정부다. 기아와 난민, 빈곤을 만드는 전쟁을 일으키고, 종식에 관심 없는 강대국들이다. 빈곤층에게 멸시, 차별, 낙인을 안기는 법과 제도, 관행들이고, 값비싸지는 도시에서 쫓겨나는 철거민과 노점상, 홈리스다. 미분양 주택 매입에 22조원을 퍼부으면서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을 외면하고,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깎는 정부와 국회다.
이토록 풍요로운 시대에 가난 때문에 사람이 죽어가는 현실을 방치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저 빈자를 돕자는 것 또한 우리가 바꿔야 할 진짜 현실을 감춘다. 도시가 화려해질수록 가난한 이들의 주거지는 열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를 방치하고 달성하는 ‘빈곤 퇴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