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 재·보궐선거를 위해 투표장을 찾았다. 입구에서 신분증을 제시하니 담당자가 선거인명부 대조 전표를 주면서 투표장 안으로 들어가라고 안내를 했다. 전표에는 등재번호와 함께 이름, 성별을 적도록 되어 있었고 내가 받은 전표에는 성별란에 ‘여’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표를 들고 투표장에서 다시 한 번 선거인명부와 대조하는 절차를 거치면서 보니 이름과 성별을 적게 되어 있는 선거인명부에는 내 이름 옆에 ‘남’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조 전표의 성별과 명부의 성별이 다른 상황, 혹시 추가적인 확인 절차를 요구받거나 안 좋은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잠시 긴장하던 순간, 문제없이 투표용지를 받았다.
궁금해졌다. 전표와 명부에 표시된 성별이 달라도 본인 확인에 문제가 없다면 애초에 전표상의 성별은 필요 없는 정보가 아닌가. 실제로 주위에 물어보니 다른 투표소에서는 등재번호만 적고 이름과 성별은 공란으로 두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결국 성별란이 있는 전표는 애초에 행정상 목적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서류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불필요한 서류 때문에 차별을 마주하지 않을까 망설이고 때로는 투표를 포기해야 하는 성소수자들이 있다.
불필요한 서류를 받아야 하는 성소수자들은 또 있다. 동성부부들이다. 지난 10일 11쌍의 동성부부가 함께 동성혼 법제화를 요구하는 ‘혼인평등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모두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했으나 이를 거부하는 혼인신고 불수리 증명서를 받았다.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서류이다. 혼인신고를 거부당할 걸 알면서 굳이 신고하러 오는 일도 없었고, 서류가 미비하다면 보완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점차 자신을 드러내고 법적으로 관계를 인정받기를 원하는 동성부부들이 나타나자, 몇해 전부터 불수리 증명서가 발급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발급된 불수리 증명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법적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동성부부들에게 둘의 관계를 그나마 드러낼 수 있는 서류가 되고 있다. 혼인평등 소송 제기 기자회견에서 동성혼이 실제 이루어지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에 한 당사자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 집에 불수리 증명서를 액자에 넣어 걸어놓고 있는데 이것을 빼고 혼인신고 접수증으로 바꾸어 걸겠다고.
그렇게 지금도 많은 성소수자들이 불필요한 행정서류를 마주하며 차별을 경험하고, 그럼에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를 풀어간다. 이것이 소수자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다.
이러한 성소수자의 삶에서 조금 눈을 돌려 시민들을 대표해야 할 국회를 보면 참으로 한심한 풍경이 펼쳐진다. 지난 8일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조정훈 국민의힘 의원이 “대한민국은 동성애가 인정되는 나라냐”고 하자,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도 없는데 틀린 발언일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를 시민으로조차 인정 않는 망언이다.
물론 이렇게 한심한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7월 대법원이 동성 동반자의 피부양자 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이후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다른 동성 커플에 대해서도 피부양자 자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서 박주민 의원이 이에 대해 질의하자,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 같은 다른 사회보험도 같은 기준으로 가야 될 거 같다는 답변을 했다. 한 동성부부의 용기있는 소 제기로 시작된 변화는 그렇게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혼인평등 소송이 제기된 다음날인 10월11일은 ‘국제 커밍아웃의 날’이다. 성소수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걸 국제기념일로 해야 할 만큼 성소수자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차별을 담담히 마주하고, 때론 용기있게 돌파하며 살아가고 있다. 불필요한 서류 몇 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망언 한마디로 지울 수 없는 모든 성소수자의 삶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