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인가 주술인가. 논란의 인물인 명태균이 미래한국연구소에서 수행했다는 여론조사란 도대체 뭐였을까. 그가 2022년 경남 창원의창 국회의원 보궐선거 공천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한 제20대 대통령 선거 국민의힘 예비선거 과정에서 뭘 어쨌다는 것인지 결국 밝혀질 일이다. 속단도, 예단도 말고 언론의 다음 폭로기사를 기다리면 좋겠다. 다만 기다리며 생각해 보자. 정당에서 후보공천을 하고 정당 간에 후보단일화를 한다면서 여론조사에 매달린다는 게 가당키는 한가.
여론조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제대로 모집단을 설정하고, 타당한 방법으로 표본을 추출해서, 정당하게 비용을 들여 응답자의 시간을 구매해서, 불편부당하게 묻는 질문에서 나온 응답을 구한다면 말이다. 누구나 여론조사 결과를 정련해서 중대한 결정의 참조자료로 사용해도 좋다. 그러나 책임 있는 조사전문가라면 여론조사 결과만을 갖고 정치적 결단을 대체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비용을 많이 쓰고 공들였다고 해도 여론조사란 민심 탐색 도구일 뿐이며, 그것도 언제나 얼마간은 결함이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획조사, 내부조사, 전략조사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여론조사 결과들은 그저 결함이 있는 정도가 아니다. 문제투성이다. 일단 제대로 된 표집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성별과 연령대 등 몇 가지 할당기준에 따라 응답자 수를 정해놓고 해당 기준을 충족할 때까지 응답거절자를 대체해 가면서 조사하기 때문이다. 요즘과 같이 응답거절자가 많은 조건에서 이 문제를 남용해서 조사결과를 조작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화를 기다렸다가 받거나, 여러 번 조사에 참여하거나, 심지어 전략적으로 반대 응답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동네 주민들을 버스로 체육관으로 실어 날라 거수기로 활용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결함이 있음을 알면서도 기획조사란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조사를 기어코 해야겠다고 덤비는 정치 신인이나 한물간 다선의원들이 널렸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다. 활용을 넘어선 남용이 가능함을 알고 있기에 기획조사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내세워 정당의 의사결정 과정을 조작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선수들이 판을 친다. 진정한 문제는 이 모든 사정을 알면서도 정치적으로 결단하지 못한 채 부실한 기획조사에 의존해서 공천도 하고 후보단일화도 하는 정당 지도부다.
책임정치가 실종된 현실을 염려하는 이들은 누구나 부실한 여론조사를 갖고 정치적 결단을 대신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개탄한다. 그러나 애초에 인과관계는 반대로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과정이 부실했기에 의심스러운 기획조사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우리 공화국에 공천용 기획조사의 뿌리가 깊다. 민주화 이행 이후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정계 복귀한 김대중의 국민회의와 김종필이 창당한 자민련을 압도하며 국정을 주도할 동력을 확보했다. 당시 신한국당 내에서 사실상 공천권을 주도했던 세력이 이른바 광화문팀을 이끌던 대통령 차남 김현철이었다고 한다. 당대의 노회한 정치인들조차 여론조사 결과를 손에 들고 정국을 쥐락펴락하는 그를 보며 알 수 없는 여론조사 결과의 힘 앞에서 속절없이 압도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론조사를 주술처럼 사용하는 게 문제다. 정치 신인이든 한물간 다선의원이건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조사결과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하는 일, 토론과 논쟁으로 해결해야 할 정치적 결단을 여론조사 한판으로 대체하는 일, 정당 지도부가 정책 노선을 결정하지 못하고 인기도에 집착하여 조사결과만을 기다리는 일 모두 주술에 가깝다. 도구가 목적이 되고,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격이다. 주술 정치를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