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고대학회·예성문화연구회, ‘동아시아 속 충주 고구려비의 새로운 이해’ 학술세미나
명문 판독·해석 새 연구성과 공개···“397년 광개토왕 당시 건립” 확산
“지안 고구려비~충주 고구려비~광개토왕릉비 순으로 세워져” 분석도

국내 유일의 고구려 비석인 ‘충주 고구려비’(국보) 연구성과를 공개한 학술대회가 지난 18일 충주에서 열려 관심을 끌었다. 사진은 동아시아고대학회, 예성문화연구회 등 학술대회 참가자 등이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서 고구려비를 둘러보는 장면이다. 홍성화 제공
고구려 시대의 비석은 국내에 단 1기만 남아 있다. 국보로 지정돼 있는 ‘충주 고구려비’다. 고구려 당시의 글자가 새겨진 명문 비석은 세계적으로도 단 3기 뿐이다.
중국의 ‘광개토대왕릉비’와 ‘지안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다. ‘광개토대왕릉비’는 19세기, ‘지안 고구려비’는 2012년, ‘충주 고구려비’는 충주 지역의 역사문화모임인 예성동호회(현 예성문화연구회) 회원들이 1979년 2월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현 중앙탑면 감노로)에서 발견했다.
‘충주 고구려비’ 같은 당대에 제작된 금석문은 문헌기록이 부족한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 중국·일본 등 고대 역사·문화 연구에 귀중한 1차 사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비석의 명문은 긴 세월 동안 닳고닳아 판독이 어렵다. 고대 금석문이 흔히 그렇듯 같은 글자를 놓고 학자마다 다르게 판독하거나, 판독되더라도 해석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국보 ‘충주 고구려비’의 세부 모습(왼쪽)과 전시된 모습. 충주고구려비 전시관, 도재기 선임기자
‘충주 고구려비’도 마찬가지다. 발견 이후 많은 연구가 진행돼 비석 4면에서 300여자를 판독했다. 하지만 비를 세운 시기나 이유, 비의 성격 등을 아직 명확히 알지 못한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명문 내용상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 대인 414년에 세워졌다고 확인되지만, ‘충주 고구려비’ ‘지안 고구려비’는 건립시기를 놓고 여러 견해가 나오는 상황이다.
지난 2019~2020년에는 연구자들이 모여 충주 고구려비에 대한 3차례의 공동 판독, 최신 과학기술 활용 판독 등의 연구도 진행했다. 당시 화제를 모은 분석은 비면 최고 윗부분에서 새로운 글자 흔적들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새 글자들은 세로로 새겨진 본문과 달리 가로로 새겨졌고, 가장 상단에 위치해 비석의 제목·명칭이라 할 제액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특히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이를 제액으로 보고 ‘永樂七年歲在丁酉”(영락7년세재정유)로 판독했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시호이니 ‘영락7년’은 곧 397년이다. 충주 고구려비가 광개토왕 재위 당시 세워졌다는 의미다. 이는 광개토왕 사망 이후 5세기 대에 세워졌다는 기존 주류 학설과 배치돼 비판적 견해가 나오는 등 논쟁을 불렀다.

‘동아시아 속 충주 고구려비의 새로운 이해’란 주제의 학술대회에서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영락7년~’ 판독 결과를 재차 강조하며 한국·중국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사진은 충주 고구려비의 제액 부분으로 추정되는 상단(빨간색 네모)의 판독 결과 모음.
5년 뒤인 지난 18일, ‘충주 고구려비’ 발견 45주년을 기념해 최근 연구성과를 검토하는 학술대회가 충주에서 열렸다. 예성문화연구회·동아시아고대학회가 건국대 글로컬캠퍼스에서 마련한 ‘동아시아 속 충주 고구려비의 새로운 이해’란 주제의 학술대회다.
고광의 연구위원은 이날 ‘충주 고구려비 발견 40주년 연구의 성과와 의의’란 주제발표를 통해 제액의 존재, ‘영락7년’이라는 판독의 경위, 후속 연구성과 등을 소개했다. 고 연구위원은 “현재 충주 고구려비 판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제액의 유무”라며 “새로운 금석문 연구방법인 과학적 조사, 선학들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영락7년~’을 판독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충주 고구려비 연대와 관련, “그동안 다양한 추정이 있지만 397년 또는 이와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세워졌다고 본다”며 “새 금석문 연구방법을 ‘광개토대왕비’ ‘지안고구려비’에도 적용하는 한국·중국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이재환 중앙대 교수는 ‘고구려 비문의 선후 관계 재검토’ 논문을 통해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 연대를 ‘영락7년’으로 보고, 현존하는 3기의 고구려 비가 지안고구려비-충주고구려비-광개토왕비 순으로 세워졌다”고 밝혀 관심을 모았다.
비의 양식적·서체 변화를 핵심으로 한 기존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 교수는 각 비석의 내용 연구를 강조했다. 그는 “비문 내용과 당시 역사적 상황을 종합할 때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왕 재위시기인 398~400년 사이, ‘지안 고구려비’는 이보다 앞선 시기, ‘광개토왕비’는 광개토왕 사후인 414년으로 보는게 타당하다”며 “후세에 남길 만한 광개토왕의 중요한 업적이 ‘지안고구려비’ ‘충주고구려비’로 남겨졌고, 최종적으로 ‘광개토왕비’에 집적됐다”고 말했다.

예성문화연구회와 동아시아고대학회가 마련한 ‘동아시아 속 충주 고구려비의 새로운 이해’란 주제의 학술대회가 지난 18일 충주 건국대 글로컬캠퍼스에서 열리고 있다. 홍성화 제공
이용현 전 경북대 교수는 397년 전후 역사적 사건 등을 종합분석한 ‘충주 고구려비에 보이는 4세기말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발표에서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가 신라 진출을 본격화한 초동기 등 4세기말 양국 관계를 나타내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그는 “충주 고구려비 편년은 지난 40여년 간 5세기 전후반으로 설정되고, 이에 맞춰 연구가 진행됐다”며 “이제 새 판독을 계기로 기존 연구의 재검토, 새로운 연구 틀을 짜나갈 필요가 있다”고 새 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홍성화 건국대 교수(동아시아고대학회장)는 4~5세기 초반 고구려의 한반도 동남부 진출로를 연구한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충주 고구려비 고찰-우벌성과 고구려 진출로를 중심으로’를 통해 새로운 진출로를 제시해 주목받았다.
홍 교수는 “현재 학계는 고구려가 왜를 공격해 신라를 구원할 당시 진출로로 단양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는 죽령로를 유력하게 본다”며 “죽령로가 아니라 소백산맥 남쪽의 문경, 예천으로 이어지는 루트로 벌재(벌령)가 있음을 주목하자”고 밝혔다. 국내외 문헌자료와 현장 답사를 한 그는 “충주 고구려비에 나오는 ‘우벌성(于伐城)’은 고구려가 신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 성격으로 보인다”며 “우벌성은 현재의 벌재 인근이 유력하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충주 고구려비 발견 당시 산증인인 장준식 국원문화유산연구원장의 ‘충주 고구려비의 발견과 그 의의’라는 기조강연도 마련됐다. 또 ‘삼국시대 백제말 지역언어의 특수성과 문어교육에 대한 국어사적 이해’(황국정·경북대), ‘쌍둥이 트릭스터로 본 <세경본풀이>’(이지수·고려대), ‘유가에서 법상(法象) 사유와 천인 관계의 구현 방안’(지현주·부산대), ‘마당극의 한국적 서사 형식’(김종희·동국대) 등의 논문발표도 이어졌다.
홍성화 동아시아고대학회장은 21일 “충주 고구려비의 새로운 비문 판독과 관련한 다양한 후속 연구성과가 발표돼 향후 충주 고구려비 연구, 나아가 당대 역사·문화상 연구가 더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학술대회를 공동주최한 길경택 (사)예성문화연구회장은 개회사에서 “과학적 기술과 접목해 글자를 판독하는 3세대 젊은 학자들이 모여 또다른 시각에서 충주 고구려비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마련했다”며 “다양한 관점에서 관심, 연구가 이어져 더 진실에 가까워 지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