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남편을 ‘오빠’라 부른다면
1930년대 노래 ‘오빠는 풍각쟁이’
그 속의 오빠는 남자 혈육 지칭
2000년 왁스 ‘오빠’는 가족 아냐
친족 넘어 연인·남편에도 쓰여
이런 호칭 사용은 선택의 문제
인위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냐
이모님·아저씨 호칭도 마찬가지
다만 불리는 이들이 호칭에 걸맞은
행동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관건
선생·사장님답지 못한 선생·사장
오빠답지 못한 오빠가 문제인 것
한류 붐에 ‘오빠’는 이제 국경 초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고 아내를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인가? 적어도 2024년 가을 남북한의 말과 글의 풍경을 살펴보면 그 답은 ‘그렇다’이다.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대통령의 아내가 메시지에 쓴 ‘오빠’를 두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이 남편, 즉 대통령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더라도 호칭 자체의 부적절함에 대해 논한다.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부부 사이에서 ‘오빠’와 ‘자기’를 쓰면 ‘평양문화어보호법’에 의해 ‘괴뢰말’이라 낙인이 찍혀 처벌받을 수도 있다.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와 친소(親疏)에 따라 자유롭게 호칭을 정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으로부터 말이 시작되고 그 말은 주고받는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듣고 보는 주변 사람들과 공유되니 그것을 둘러싼 논쟁은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오빠’의 역사
1929년에 발표된 임화의 시 ‘우리 옵바와 화로’와 1938년에 박향림이 부른 ‘오빠는 풍각쟁이’에 등장하는 ‘오빠’는 누구일까? 앞의 시에서는 끝없는 신뢰와 애정이 묻어나는 반면 뒤의 노래에서는 미움을 넘어선 증오까지 느껴지지만 모두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남매 사이에서 쓰인 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2000년에 왁스가 부른 ‘오빠’나 2007년에 박현빈이 부른 ‘오빠만 믿어’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녀는 나쁘니 나만 바라봐”라든지 “오빠 한번 믿어봐 너만 바라보리라 평생토록 내가 안아줄게”라는 말이 남매 사이에 오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왁스의 안타까운 부름에 응했다면, 박현빈의 달콤한 말에 속았다면 이들은 한 가정을 이뤘을 터, 그 후에도 호칭은 여전히 ‘오빠’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한 세기가 채 되기도 전에 ‘오빠’는 울타리를 넘어서 쓰이는 호칭이 되었다가 다시 새로운 울타리 안에서도 쓰이는 호칭이 되었다.
‘오빠’의 이러한 변화는 호칭 전반에 나타나는 변화, 즉 친족 명칭의 확대나 일반화 과정과 맥을 같이한다. 가족이나 친족 사이에는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 있으니 그에 따라 호칭과 지칭을 쓰면 되지만 그 외의 관계에서 호칭은 따로 정해진 것이 없다. 주변에 부모님 또래의 어른들이 있을 때 부를 말이 마땅치 않은데 이때 ‘아저씨’와 ‘아줌마’가 호출된다. 이 둘은 본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촌을 부르는 말이지만 연배가 비슷한 데다 친족과 다름없다는 친밀감을 표현할 수도 있으니 안성맞춤이다. 나이가 어린 이가 있다면 이름을 부르면 되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이가 이웃에 있다면 호칭이 난감하다. 이때 가족 간에 쓰이는 ‘오빠, 형, 누나, 언니’가 활용된다. 피를 나눈 형제자매 사이에 쓰이는 말이니 이보다 더 정감을 잘 표현할 말은 없다. 이렇듯 가족이나 친족 사이에서 쓰이는 호칭이 확대되는 것은 흔히 나타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넷 중에 ‘오빠’는 좀 묘하다. ‘형’과 ‘언니’는 동성 사이에서 쓰이니 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 그러나 ‘오빠’와 ‘누나’는 남녀유별(男女有別)을 따지는 이라면 쓰기가 꺼려진다. 그나마 ‘누나’는 스스로 철없는 동생이라 생각하며 스스럼없이 쓸 수 있으나 ‘오빠’는 아니다. 남녀가 짝을 지을 때 남자가 조금 나이가 많은 것이 일반적이니 ‘오빠’로 불릴 수 있는 이는 모두 진정한 ‘이성(異性)’이고 나아가 연인이나 배우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세대나 지역에 따라 가족이 아닌 대상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꺼리거나 금기시되기도 한다. 또한 개인의 성향에 따라 이 말을 쓰지 않거나 들으면서 거북해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이 ‘오빠’와 가정을 꾸리고 난 뒤에도 입에 붙은 이 말을 그대로 쓴다는 데 있다. 호칭 중 부부 사이의 호칭이 가장 어려운 법인데 갓 결혼한 이들이 ‘여보, 당신’으로 부르는 것은 극히 어렵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나마 ‘○○아빠, △△엄마’를 쓸 수 있지만 그러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그러니 결혼 전 호칭이 그대로 쓰인다. 양가 어른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따가운 눈총을 보내도, 아이가 태어나도, 하늘의 뜻을 안다는 나이 쉰을 넘어도 익숙한 그 호칭을 바꾸지 못한다. 호칭은 둘 사이의 문제이니 모른 척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을 법도 한데 ‘오빠’만은 오랜 기간,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넓은 지역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는 것이다.
전 국민의 선생화, 전 직원의 사장화
호칭은 아는 사이보다 모르는 사이에서 더 어렵다. 아저씨와 아줌마, 그리고 형과 오빠 등은 안면이 있는 사이에서 쓸 수 있다. 그러나 설사 부모님 또래로 보일지라도 ‘아저씨’와 ‘아줌마’라는 말을 썼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한때는 이 두 말이 꽤 자연스럽게 쓰이기도 했으나 어느 순간 나이와 결혼 여부에 대한 판단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아가 아저씨와 아줌마가 무지, 무례, 몰상식, 몰지각의 대명사로 그려지면서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이 되었다. 이 틈을 파고든 말이 ‘선생님’, 그리고 ‘사장님’과 ‘사모님’이다.
‘선생(先生)’은 한자의 뜻으로만 보면 먼저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지만 보통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남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 남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학예가 뛰어난 사람에게만 써야 하나 모르는 이를 높이는 말로도 쓰인다. 물론 ‘선생’이라고만 쓰면 높이는 뜻이 없거나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이를 부르는 말이니 ‘님’을 붙여서 써야 한다. 성이나 직업을 안다면 그 뒤에 붙여도 되고,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그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니 꽤나 유용한 호칭인 셈이다. 본래의 뜻이 좋고 그리 불리는 사람의 하는 일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 생각되니 이 호칭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선생님’만큼이나 많이 쓰이는 ‘사장님’이나 이와 유사한 호칭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본래 ‘사장(社長)’이라 하면 회사라고 불릴 만큼의 규모가 되는 업체의 책임자여야 하지만 구멍가게를 비롯한 개인사업을 하는 이들도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회사에 소속된 직원이지만 높이는 의미에서 ‘사장님’이라 부르게 됐고 급기야는 사장이 될 수도 있을 법한 나이의 모든 남자를 부르는 말이 되었다. 덩달아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는 선생님이나 사장님의 부인에게나 쓸 수 있는 ‘사모님’이 되었다. 사장님이나 사모님이 아닌 것이 분명한 이들, 예를 들면 여성 미화원이나 판매원들도 한술 더 떠서 ‘여사님’이라 불리기도 한다. ‘여사(女士)’는 본래 학덕이 높고 어진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니 높여도 너무 높인 듯한 느낌이 든다.
호칭의 자유, 무조건 올림의 마법
원칙적으로 호칭은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 사이에서 결정할 문제이다. 손위의 남자 형제는 본래 ‘오라비’라 불렀고 이를 높일 때는 ‘오라버니’나 ‘오라버님’을 썼다. 그런데 ‘오라비야’ 정도의 느낌인 ‘오랍아’에서 ‘오빠’란 말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버르장머리가 없어보이는 이 말이 훨씬 더 친근한 느낌의 말이 되었다. 이 말이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밖에서 쓰이게 됐을 때도 역시 친근함의 표현이었다. 결혼 후에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역시 나만 바라보기를 바라는 혹은 평생 안길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처럼 ‘오빠’의 역사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겪었고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오빠’를 비롯한 ‘아저씨’와 ‘아줌마’, 나아가 ‘선생님’과 ‘사장님’, 그리고 ‘사모님’과 ‘여사님’이란 호칭은 부르고 불리는 이들이 선택한 것이라면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진짜 오빠’는 서운할 법도 하지만 그 또한 다른 ‘가짜 누이’한테 ‘오빠’라고 불릴 수 있으니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진짜 선생님이나 사장님의 처지에서는 ‘개나 소나’ 선생님 혹은 사장님으로 불린다고 불만일 수 있으나 이들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다. 그런데 부르는 사람이나 불리는 사람이 선택한 호칭인데 그것을 보고 듣는 이들이 시비를 건다. 시비에서 그치지 않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데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여보, 당신’이 어색한 신혼부부에게 ‘오빠, 자기’를 대신할 말을 제시하지 못했다면, 모르는 이를 ‘아저씨, 아줌마’로 불렀다 당할 봉변을 모면할 수 있는 대체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호칭의 변화를 살펴보면 ‘무조건 올림’의 경향을 읽어낼 수 있다. 가족 사이에서나 쓰던 호칭을 그 외의 사람들에게 쓰는 것은 그 대상을 가족처럼 친근하게 대하겠다는 마음의 표시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을 ‘이모님’이나 ‘삼촌’이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원칙적으로는 ‘종업원’이라고 부르거나 그도 저도 안 되니 ‘여기요’라고 어정쩡하게 쓰다가 개발해낸 호칭이 이것이다. 모르는 이에게는 절대로 써서는 안 될 것 같은 ‘아버님, 어머님’이란 호칭을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해 보이지만 이것이 자신의 부모를 대하듯 나를 대하겠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최대한 높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장님’과 ‘사모님’ 또한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무조건 상대를 높여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그들의 선택이다.
무조건 올림의 극단적이고도 성공적인 사례는 젊은이들의 말에서 나타나는 ‘님’에서 찾을 수 있다. ‘님’은 반드시 다른 말의 뒤에 붙여 써야 하는 접미사나 의존명사이니 홀로 쓰일 수는 없다. 그런데 1990년대에 PC 통신이 시작되면서 온라인상에서 만나는 대상에 대한 호칭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가상공간의 속성 때문에 대화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용자들은 이름이나 아이디 뒤에 무조건 높임을 나타내는 ‘님’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님’으로 상대를 부르기도 했다. 기존의 어법이나 화법에서는 맞지 않을 수 있으나 이용자들의 선택이었고 이용자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말이 현실에서도 복잡한 모든 관계를 전혀 따지지 않으며 상대를 높이는 말로 쓰이고 있다.
‘오빠’와 ‘자기’의 새로운 확산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간 ‘오빠’와 ‘언니’는 이제 국경도 넘고 있다. 한류 열풍에 편승해 한국어도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데 이 두 단어는 독특한 의미와 용법을 보이며 한국어 발음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멋지고 예쁜 아이돌을 ‘오빠’와 ‘언니’로 불러야만 그 감성이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말들이 단순히 친족관계나 이웃을 부르는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휴전선 너머 북녘에서는 피를 나눈 형제 외에는 오빠라 부르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문을 닫아걸어도 ‘오빠’와 ‘자기’의 확산을 막지 못해 고심하고 있다. 이는 자생적으로 만들어져 퍼져나간 이 말들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빠’나 ‘사장님’은 죄가 없다. 형제자매가 아닌 이를 ‘오빠’라 부르든, 결혼하고 나서도 남편을 그렇게 부르든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사장이나 여사가 아니어도 부르기에 편하고 불리는 이가 꺼리지 않는다면, 나아가 정감까지 담겨 있다면 그 호칭에는 죄가 없다. 모든 호칭에 ‘무조건 올림’이 적용된다고 해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초래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높이는 것이 서로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여기에 그렇게 불리는 이들이 그 호칭에 합당한 행동만 하면 된다. 심술쟁이나 욕심쟁이 오빠가 아니면 되고 다른 여자를 바라보지 않고 평생 안아주겠다는 약속을 어기지 않으면 된다. 구멍가게든, 대기업이든 건전한 성장을 위해 애쓰면 된다. 문제가 있다면 오빠답지 못한, 사장님답지 못한 이들에게 있을 뿐이다.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