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4년차’에 첫 연극 도전
슬픔·분노·익살·우울·광기
복합성을 세밀하게 해석해
예술의전당서 내달 17일까지

<햄릿>으로 연극 무대에 데뷔한 조승우. 예술의전당 제공
조승우는 ‘신인 연극 배우’다. 그는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으로 데뷔한 이래 수많은 영화, 드라마에서 스타성과 연기력을 겸비한 최정상 배우로 자리해왔다. 특히 그가 같은 공연예술인 뮤지컬 배우로 최고의 티켓 파워를 자랑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연극에 출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낯설다.
조승우가 데뷔 24년 만에 선택한 연극 데뷔작은 <햄릿>. 1601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희곡이다. 매일 밤 800여 개 도시에서 <햄릿>이 공연 중이라는 통계도 있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배우가 저마다의 햄릿을 연기해왔다. 조승우는 너무 많이 공연되기에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가 어려워 가장 도전적인 작품을 연극 데뷔작으로 선택한 것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지난 18일 개막해 다음달 17일까지 공연하는 <햄릿>은 이미 전 회차 매진됐다. 지난 25일 관람한 연극 <햄릿>과 ‘조승우’ 사이엔 이질감이 없었다. 조승우는 오랜 시간 연극을 해온 배우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빅토르 위고)인 햄릿의 다채로운 면모를 일일이 드러냈다. 아버지의 피살에 분노하고,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를 역겨워하고, 이에 계획적으로 미친 척하다가, 곧 진짜 미친 것처럼 날뛴다. 연인 오필리아를 사랑하지만 또한 증오하는 것처럼 보이고, 유랑극단을 불러 얼간이처럼 함께 놀다가 그들에게 숙부의 죄를 밝힐 연극을 공연하도록 치밀한 음모를 꾸민다.
연극은 처음일지언정 뮤지컬에서는 잔뼈가 굵은 조승우는 관객과도 자연스럽게 밀고 당긴다. 어떤 배우는 절규하고 분노하는 열연을 하다가도 가끔 ‘열연에 자아도취됐다’는 인상을 풍긴다. 조승우의 절규와 분노는 최고조에 이르러서도 극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정확한 비율로 녹아서 흐른다. ‘구더기가 시신으로 포식한다’고 이르는 대목에선 관객이 구더기라도 되는 양 객석을 향해 말하는데, 이를 비롯한 여러 대목에서 폭소가 터진다. 3분 전까지 격정적인 연기로 관객의 호흡을 앗아갔던 배우가, 곧바로 긴장을 풀어준다. <햄릿>은 비극이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듯 모든 순간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다는 점이 확인된다. 아울러 햄릿이 슬픔, 분노, 익살, 우울, 광기, 자학, 그리고 정의를 간직한 복합적 인물이라는 사실이 조승우의 연기를 통해 확실히 드러난다.

연극 <햄릿>에서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죽이려다가 기도하는 모습에 주저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연극 <햄릿>의 초반부 한 장면. 숙부 클로디어스와 어머니 거트루드의 결혼에 햄릿은 불편함을 느낀다. 예술의전당 제공
<햄릿>은 오랜 기간 갖가지 방식으로 변형돼 선보였고, 그 와중에 햄릿의 성격도 바뀌었다. 올해만 해도 한국의 주요 연극 단체 두 곳이 먼저 <햄릿>을 선보였다. 6월 선보인 신시컴퍼니의 <햄릿>은 이호재·박정자·전무송·손숙·정동환 등 원로들이 조역 및 단역으로 등장했다. 상대적으로 젊은 햄릿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건 역시 이들 노장이었다. 7월 개막한 국립극단 <햄릿>은 ‘햄릿 공주’가 주인공이었다. “착한 공주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악한 공주는 뭐든지 할 수 있지”라는 대사에서 보듯, 햄릿 공주는 용의주도하게 복수를 계획해 불도저처럼 실행했다.
이번 예술의전당 <햄릿>은 해석 면에선 가장 전통적이다. 최근 연극 무대에서 종종 사용되는 영상, 또 하나의 캐릭터처럼 활약하는 화려한 조명은 없다. 간혹 스모그가 나오고 미니멀한 음향이 깔리는 정도다. 무대미술가 이태섭은 토월극장의 깊이를 살려 23m의 계단식 복도가 무대 후면에서 전면으로 내려오도록 설계했다. 단순하지만 장엄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소근거림까지 들리는 발성으로 말맛 나는 대사를 명확히 전달한다. 연극은 원래 배우와 대사의 예술임을 이번 <햄릿>은 다시 말한다.
최근 수년간 <엔젤스 인 아메리카> <와이프> <그을린 사랑> 등으로 각종 연극상을 수상하며 가장 바쁜 젊은 연출가로 꼽히는 신유청은 ‘연출의 글’에서 “햄릿은 언제나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싶을 거다”라며 “뒤틀어진 시대, 악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고 사라졌던 햄릿, 자신의 짧은 생애를 한껏 불태워 악과 맞섰던 덴마크 왕자의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당부했다. 클로디어스 역에 박성근, 거트루드 역에 정재은, 호레이쇼 역에 김영민, 레어티즈 역에 백석광, 오필리아 역에 신예 이은조가 출연한다.

연극 <햄릿> 종반부 장면. 주요 인물의 시신을 배경으로, 햄릿 역시 죽음을 앞두고 절친한 호레이쇼에게 안겨 유언을 남기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