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위한 연금개혁’이란 플래카드를 보았다. 윤석열 대통령도 ‘세대 간 연대’가 아닌 ‘세대 간 공평성’을 연금개혁 원칙으로 제시했고, 여당도 ‘청년을 위한’ 구조개혁을 하겠다고 한다. 청년을 위한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만은 찜찜함을 지울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청년세대에게 현재 큰 고통을 야기하고 있는 일자리 불안정성과 취약한 노동권 문제를 그대로 시장에 맡겨놓은 채, 유독 미래 공적연금을 축소해 청년을 위하겠다는 게 위험해 보여서다. 20대 노동자 중 40% 이상이 비정규직이라 한다. 우리 사회는 청년에게 제대로 된 직업세계 정착의 기회와 꿈을 펼칠 기반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청년세대의 연금보험료 부담을 논하기 전에 이를 낼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말하는 게 먼저다. 괜찮은 일자리 확대 등 노동권 강화를 위한 정책적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보험료 부담과 공적연금 보장도 같이 줄이는 건 결국 미래의 노동도, 삶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둘째, 연금의 세대 간 불공평성은 바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국민연금 삭감에서 크게 비롯되는데, 청년세대 국민연금 하락 문제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세대 간 불공평성 문제를 말하는 건 의아하다. 2007년 연금개혁 이래 연금보험료를 낼 때 미래 보장받는 연금액은 매년 떨어지고 있다. 이런 연금 삭감의 영향은 후세대일수록 더 크다. 2040년, 2050년에 새로 국민연금을 받는 이들은 더 오래 연금보험료를 내도 연금액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는다. 직접적 해법은 2007년 60%에서 이미 상당히 떨어진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어느 정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정부는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해 미래 연금액을 추가로 더 삭감할 것을 제안했다. 세대 간 공평성을 말하면서 미래세대의 노후보장을 더 약화시키자는 것이다. 정부는 보험료 인상 속도를 출생연도에 따라 달리해 세대 간 공평성을 실현하겠다고 했지만, 그 복잡함에 비해 보험료율 차등인상 조치로 청년세대가 누리는 편익은 그 시기도, 규모도 매우 제한적이다.
셋째,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미래 연금재정 구조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음에도, 지금처럼 노동소득의 극히 일부만으로 연금재정을 충당한다고 가정한 채 미래세대 부담을 말하는 건 이상하다. 여러 나라에서 자본과 노동은 연금재정을 1:1로 부담하지 않는다. 자본이 더 많이 부담한다. 기술혁신과 노동의 역할 변화로 이미 노동소득에서 자본소득, 부가가치세 등으로 연금재정 기반은 넓어지고 있다. 또한 ‘청년은 생산하며, 노인은 소비한다’는 역할 경계도 무너지고 있다. 한국 연금재정에서도 노동과 자본의 분담, 계층 간 분담 구조 변화는 불가피하다. 미래세대의 경제규모, 부의 원천, 생산방식, 노동소득 분배 등에 따라 연금재정 틀이 달라져야 국민연금은 지속 가능하다. 앞으로 계속 노동소득 일부에만 연금보험료를 부과한다고 하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연금재정에선 세대에 앞서 자본과 노동, 부자와 빈자 간 책임분담이 더 중요하다.
청년세대의 노동과 삶의 불안정성을 우려한다면 강력한 소득재분배 효과를 가진 국민연금이 갖는 가치는 더 크다. 평등효과도 없고 종신보장도 안 되는 사연금으론 어렵다. 소위 세대 간 공평성을 위해 국민연금을 축소시키는 정책은 청년이 공적연금을 사회보장이 아닌 저축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국민연금 폐지론 같은 극단적 견해를 더욱 지지하게 만들 수 있다. 지난봄 숙의를 거친 시민공론조사에서 전체 시민은 물론 20대도 국민연금 보장성 강화론을 더 많이 지지한 바 있다. 공동체의 노후보장이 갖는 가치를 도외시하고, 노동과 자본 및 빈자와 부자 간 적절한 연금재정 분담으로의 변화를 꾀하지 않은 채, 기성세대가 연금정치에서 청년세대를 이기적인 세대로 몰아가는 건 아닌지, 오히려 이들의 선호를 호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