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포스트(WP)가 미 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지지 사설을 준비했다가 사주인 아마존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의 지시에 따라 철회한 후, 불과 사흘 만에 20만명의 구독자를 잃었다. 전체 유료 구독자의 8%에 달하는 숫자다. 앞서 LA타임스도 해리스 지지 선언을 하기로 했다가 사주 반대로 불발되자, 이에 항의하는 편집위원들이 줄사퇴하는 후폭풍을 겪고 있다.
사설을 통해 지지 후보를 밝히는 것은 미 언론의 오랜 관행이다. 시대가 어떤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누가 그에 가장 가까운 후보인지 설명함으로써 독자에게 판단 잣대를 제공하는 걸 언론의 공익적 사명이라 여겼다. 언론사의 지지 후보가 정권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고, 의견과 사실은 철저히 분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몇년 전부터 이런 관행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2020년에는 마이애미헤럴드 등 30여개 신문사 사주인 맥클래치가, 2022년에는 시카고트리뷴 등 200여개 신문사를 소유한 앨든글로벌캐피털이 지지 선언을 중단했다. 당시 이들은 “불행히도 충돌하는 세력들 사이에 공통분모가 사라졌고, 독자들은 기사와 사설의 차이를 혼란스러워한다”고 이유를 달았다.
WP의 베이조스 역시 ‘혹독한 진실’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사람들이 언론이 편향됐다고 믿는 상황에서 신문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결정”이라고 포기 이유를 밝혔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선택일 수 있다. 그 결정이 최소한 1년 전에 내려졌다면 말이다. 대선을 불과 11일 앞두고 내린 결정이기에 납득할 만한 설명은 못 된다. WP의 포기 선언 직후 그가 창립한 우주 기업 ‘블루오리진’ 임원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만난 사실이 드러나면서, 트럼프의 ‘언론 길들이기’에 굴복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베이조스 결정에 반발한 한 WP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는 아직 독재자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용할수록 그에 더 가까워진다.” 베이조스가 인수한 후 새로 생긴 WP의 슬로건은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는다’이다. 이 슬로건은 이제 ‘민주주의는 침묵 속에서 죽는다’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