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28일 3인으로 운영하던 소위원회를 ‘4인 체제’로 바꾸고, 위원 1명만 반대해도 진정 사건을 소위에서 각하·기각시킬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꿨다. 이 안건은 인권위원 6명이 찬성표를 던져 의결됐다. 인권위는 출범 뒤 23년간 소위 위원 3명 의견의 만장일치로 운영되던 관행을 바꾼 것이다. 갈등적 진정 사건을 많이 다루는 인권위를 인권위답게 운영하지 않겠다는 공개적 선언일뿐더러, 인권위의 손발을 묶으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이번 결정은 정의기억연대가 수요집회 현장에서 극우단체의 인권 침해를 정부가 방치한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이 진정을 지난해 8월 당시 김용원 소위 위원장이 3명의 뜻이 모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을 내리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정의연이 바로 행정소송을 냈고, 법원에서도 위법성을 지적하며 제동을 걸자 아예 인권위가 규정을 고친 것이다. 이날 남규선 위원은 “위법한 결정에 대한 면죄부를 주겠다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그동안 인권위가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로 의결한 것은 ‘인권 침해 가능성을 폭넓게 보고 신중하게 논의하자’는 뜻이었다. 덕분에 인권 침해 피해자들의 진정은 쉽게 기각·각하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결정으로 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라는 인권위 기능이 약화될 우려가 크다. 그런데도 인권위가 앞장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니 어이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인권위는 윤석열 정부 들어 본분을 망각한 지 오래다. 통계로도 엄연히 확인된다. 2024년 6월 기준 진정은 지난해 동기 대비 9.3%, 사건 처리는 21.4% 감소했다. 이번 바뀐 규정으로 자의적으로 사건을 기각하는 일이 더 잦아질 게 불 보듯 뻔하다. 이번 결정 후 안건 처리에 효율성을 기할 수 있다는 이유를 대지만 억지다. 인권위가 단순히 숫자로만 의결하는 곳이 아님을 진정 모르는가.
인권위 주요 임무는 인권 침해와 차별 행위에 대한 조사와 구제다. 그 논의와 처분이 쌓여 ‘인권 보루’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지금 역주행하는 인권위는 존재 의미조차 퇴색하고 있다. 유엔도 인권위를 우려하는 상황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결정은 인권위를 무력화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창호 인권위는 ‘인권에는 좌우가 없다’는 말을 되새기고 스스로의 무력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