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한계는 어디에서 드러날까? 그 답은 소리와 이미지 사이에 있는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차이는 오비디우스의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이야기에서 잘 읽을 수 있다. 이미지를 중시했던 나르키소스와 목소리의 상징인 에코의 슬픈 사랑은 인식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의 밀당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미지를 소리로 포착하려고 하면, 그 소리가 보여주는 것은 이미지의 끝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말은 이미지의 끝자취를 지시하는 무엇에 불과하다는 것. 말로는 결국 실체를 붙잡지 못한다는 것. 생각도 말에 남은 이미지의 마지막 흔적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이, 어쩌면 이미지의 흔적을 뱅뱅 도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사물의 세계란 사실 이미지의 흔적에 불과하기에. 이는 데리다라는 철학자가 주목한 물음이기도 하다. 릴케가 <어린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들>에 남긴 말이다.
“대개 사람들이 우리에게 믿게 하려 하듯, 사물들은 그렇게 온전히 이해 가능하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건은 말로 표현될 수 없고, 언어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세계에 도달해야 완성된다. 이들 모두보다 훨씬 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예술 작품들이다. 그들의 생명은 우리의 삶 곁에서 영원히 지속된다.”
릴케의 말은 언어의 근본적인 한계를 잘 보여준다. 사물의 끝자취만 간직하고 있는 언어만으로는 사물과 사태와 사건의 전체를 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는 말을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물론 대개는 ‘언어도단’의 경계에서 멈춘다. 하지만 말의 한계를 뛰어넘고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릴케가 말하는 시인들이 그들이다. 말과 그림의 상보적인 관계를 이용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이를 생업으로 삼는 이들이다. 이들이 겪는 산고도, 비유컨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려고 노력하는 선수들의 그것에 하등 뒤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용기와 격려를 부탁드린다. 거창한 부탁은 아닐 것이다. 동네 서점에서 번역이든 창작이든, 시집이든 소설이든, 좋은 책 한 권 사서 읽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