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차도 몇 년 타면 고칠 곳이 생긴다. 관리를 잘하면 그 시기를 좀 늦출 수 있지만, 결국 수리할 곳이 늘어난다.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들도 다르지 않다. 어떤 제도나 특정한 시점의 사회적 필요와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다. 세월이 흘러 필요와 조건이 달라지면 그 제도는 처음처럼 효율적이지 않게 되고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을 일으킨다. 자동차처럼 제도도 고쳐가며 쓰든지 폐기해야 한다.
영조는 세금 개혁인 균역법을 실시했지만 그것만 했던 것은 아니다. 재위 17년째인 1741년에 관료제도 개혁 ‘이조낭선이혁절목(吏曹郞選釐革節目)’을 반포했다. 절목(節目)이란 법률, 혹은 규정이다. 이조(吏曹)는 이조, 병조, 형조 등 6조의 이조를 말한다. 낭선(郞選)은 ‘낭관(郎官)의 선발’을 말하고 이혁(釐革)은 개혁한다는 뜻이다. 법령의 명칭을 풀이하면, ‘이조 낭관의 선발 제도를 개혁하는 법령’이라는 뜻이다.
이조 낭관은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의 통칭이다. 조선 왕조는 문관이 무관보다 강했다. 이조는 문관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부서였다. 그런데 조선 왕조의 인사행정은 오늘날 우리 짐작과 크게 달랐다. 문관 인사에서 사실상의 권한을 장악한 사람은, 왕도 아니고 장관이나 차관에 해당하는 이조 판서나 참판도 아니었다. 그 실질적 주관자는 이조 정랑과 좌랑이었다. 이조 판서도 마음대로 개입할 수 없었다. 이조 정랑과 좌랑을 합해 이조 전랑(銓郞)이라고 불렀다. 전(銓)은 저울대이다.
이조 전랑은 6조의 다른 낭관과 크게 구별되는 몇 가지 권한을 가졌다. 일반적 관료조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권한이다. 자기 후임자를 추천하는 ‘자대권(自代權)’과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 당하관에 대한 ‘통청권(通淸權)’을 가졌다. 전랑을 지낸 후 자신이 옮길 관직을 스스로 청하는 권리도 있었다. 정3품 이하 당하관은 조정의 최고위직과 몇 자리 안 되는 일부 지방 수령을 제외한 사실상 대부분의 관료를 포괄했다. 어떤 당하관이 청직(淸職), 혹은 청요직(淸要職)이라 불리는 힘 있고 명예로운 자리에 적합한지 판단해 후보자로 추천하는 권한이 ‘통청’이다. 현임 전랑이 전임 전랑과 의논해 자대권과 통청권을 행사했다.
이조 전랑의 힘은 정승 못지않았다. 이중환은 저서 <택리지>(1751)에서 이조 전랑이 “별다른 사고가 없으면 평보(平步)로 정승과 판서에 오른다”로 썼다. 20대 후반~30대에 이조 전랑을 지내면 뚜벅뚜벅 걸어서 정승과 판서가 됐다는 말이다. 전랑의 권한은 15세기 후반 사림이 등장하던 무렵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와 조정의 상황에서 가능했다. 당시 사림은 기득권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존재였다. 16세기에 사림정치가 정착되면서 전랑권이 조정의 인사 관행으로 정착되었다. 전랑권은 조정에서 권력 전횡을 막는 장치로 오래 기능했다.
16세기 후반 당파가 형성되면서 엘리트 관료와 벌열 가문이 일체화되었다. 전랑직은 벌열 간 쟁투의 목표가 되었다. 전랑들도 힘든 업무는 피하고 권한은 누렸다. 영조는 관료조직의 공적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벌열 간 분쟁과 갈등의 요소들을 개혁해야 했다. 그가 추진했던 탕평정치의 성공을 위해 취한 조치 중 하나가 바로 1741년 전랑권 폐지였다. 균역법만큼이나 중요한 개혁이었다. 이 조치로 결국 전랑권은 소멸된다.
현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노동, 의료, 사교육 등 민간부문 개혁을 추진했다. 아마도 검찰, 감사원, 국세청, 경찰 등 정부 사정기관이 가진 힘으로 가능할 것으로 확신했던 듯하다. 그 개혁의 추진 과정과 결과가 정권의 힘을 강화할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결과는 예상과 크게 달라 오히려 이들 기관 자체의 무능력과 일탈이 부각되고 있다. 개혁은 금지하고 처단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방식으로 작동되게 하는 것이다. 사정만으로 개혁을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