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 경쟁적으로 ‘보수의 텃밭’ 찾아 여권 주도권 싸움
총선 이후 윤 대통령 외면…한 대표에 힘 실어줄지 관심
[주간경향] 지난 10월 30일 윤석열 대통령은 경북 울진에서 열린 신한울 원전 1·2호기 준공식과 3·4호기 착공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치켜세우며 “이런 지도자들의 혜안과 결단 덕분에 원전 강국이 됐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찬사는 며칠 전 여당 대표의 입에서도 나왔다. 지난 10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45주기 추도식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박 전 대통령께서는 도전 정신과 애국심으로 변화와 쇄신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이날 추도식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한 대표를 향해 욕설하는 돌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윤-한, 영남과 아무런 지역적 연고 없어
윤 대통령의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를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윤 대통령과 한 대표가 최근 며칠 사이 박 전 대통령 찬사에 경쟁적으로 나선 것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박 전 대통령을 여전히 보수의 상징으로 여기는 영남 지역에서 윤-한 대결의 승패가 결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을 떠받치고 있는 열성 지지자의 3대 주축은 영남·노령 유권자·부유층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중 두 가지 특성을 갖고 있는 ‘영남의 나이 많은 유권자’가 사실상 여당의 정책 방향성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도 마지막까지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최근 김 여사에 대한 특검 요구 등 야당의 공세에 밀리고 있는 여권이 그나마 마지막 끈을 쥐고 있는 것도 영남이라는 지역적 기반이 있기에 가능하다.
지난 10월 16일 부산 금정구청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단일화에도 큰 격차로 승리했다. 한 대표가 김 여사에 대한 의혹 해소를 용산 대통령실에 적극적으로 주문하고 나선 것은 이곳 부산 금정구청장 선거 승리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 전 한 대표가 이곳을 여섯 번이나 방문했고, 선거 후에는 윤 대통령과 한 대표가 각각 다른 시간에 경쟁적으로 이곳을 찾은 이유도 여권의 주도권 다툼과 관련이 깊다.
윤-한 대결에서 두 정치인이 영남과 아무런 지역적 연고가 없다는 점은 흥미롭다. 다만 현재 친윤(친윤석열)계의 영남 지역 의원들 다수는 중진이고 수적으로도 유리한 반면, 친한(친한동훈)계는 대부분 초선이고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친한계에 속하는 한 당내 인사는 “영남 지역에서는 지역 주민이 여당이 힘을 합쳐 잘되기를 바랄 뿐이지, 친윤과 친한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한 친한계 인사는 “영남은 유교적인 보수 사상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인데, 김 여사가 윤 대통령의 결정을 좌지우지했던 것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다”면서 “왜 윤 대통령이 집안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냐는 정서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남 보수가 내세우는 ‘박정희 정신’과 관련해서는 윤 대통령이 우위에 서 있다고 하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윤 대통령은 대선 국면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평가하는 등 호남을 향한 구애 전략을 펼쳤다”며 “대통령 취임 이후 지지율이 내려가면서 오히려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하는 등 영남 수성 전략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유권자가 확장되는 국면에서는 호남을 향한 서진 전략을 펼치고, 유권자가 축소되는 국면에서는 영남을 지키는 동진 전략을 펼치는 것이 국민의힘의 통상적인 공식이라는 것이다. 홍 소장은 “그런 측면에서 이미 영남은 윤 대통령이 선점한 반면, 한 대표는 뒤늦게 영남 유권자 경쟁에 뛰어들었다”면서 “결국 영남 민심은 윤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뢰하는 반면, 한 대표에 대해서는 여전히 보수 지도자로서의 적합도를 따지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영남 지역 유력 일간지 매일신문은 지난 10월 30일자 지면에 ‘한동훈 방식은 필패한다’는 조두진 논설위원의 칼럼을 실었다. 조 논설위원은 야당과 여론에 떠밀려 총구를 내부로 돌리는 ‘한동훈 방식’은 적당하지 않다며 총구를 외부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즉 총구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 칼럼은 영남의 정서를 일부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홍형식 소장은 “지난 7월 전당대회에서 영남은 한 대표에게 ‘선이재명, 후김건희’를 사실상 주문했다”고 말했다. 이번 달에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재판 1심 선고 등을 앞둔 이재명 대표의 공격수로는 검사 출신인 한 대표가 적당하다고 본 것이다. 홍 소장은 “그런데 재보선을 앞두고 한 대표가 선거에서 불리해지자, 김 여사 카드를 먼저 꺼내 들었다”고 말했다.
차기 대선주자 경쟁과도 복잡한 역학관계
지난 4월 총선 이후 여권에 대한 민심은 극도로 악화했다. 김 여사에 대한 의혹이 줄줄이 터져 나왔지만 윤 대통령은 특검법 거부권으로만 맞섰다. 이런 과정에서 윤 대통령을 옹호하던 ‘영남 정서’의 방어선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갤럽의 지난 10월 넷째 주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20%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대구·경북(TK)에서는 26%, 부산·울산·경남(PK)에서도 27%에 불과했다. 다른 지역보다는 높지만 유권자의 겨우 4분의 1 정도만 윤 대통령을 지지했다(자세한 여론조사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하지만 국민의힘 지지율은 각각 46%를 기록하며 확실한 우위를 지켰다. 안일원 리서치뷰 대표는 “영남은 여전히 국민의힘이나 한 대표에게는 신뢰의 끈을 쥐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절반에 가까운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정치의 차원에서 봤을 때 보수층의 상당수가 윤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 김 여사에 대한 의혹이 계속 터져 나오면서 추세적으로는 우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안 대표는 “김 여사 사건을 털고 가지 않으면 계속 수세에만 몰리는 국면이기 때문에 한 대표가 대표 취임 후 100일 동안 여러 노력을 했으나 허사였다”고 해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남 역시 결국 보수의 대안인 한 대표에게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 대표의 예측이다.
‘비한동훈’ 깃발을 들고 나선 오세훈 서울시장도 점점 주목받고 있다. 오 시장은 지난 10월 29일 여당 중진들과 모임을 하고 ‘여당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 진단을 내렸다. 한 대표를 겨냥한 공세라고 할 수 있다. 안 대표는 “오 시장은 지금 시장직을 수행하고 있어서 김 여사 의혹을 둘러싼 중앙 정치에 얼굴을 내밀 상황이 못 된다”고 말했다. 홍 소장은 “영남에서는 한 대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 대신 강경 보수주의자이자 영남 출신인 홍준표 대구시장에 관심을 더 가질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차기 대선주자를 둘러싼 영남권의 경쟁은 ‘윤-한’ 대결 속에서 복잡한 역학 관계를 지니고 있다. ‘윤-한’ 대결에서 영남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누구든 이곳의 민심을 얻는 사람이 유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