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의 엇갈린 셈법 사이…내 정년은 언제일까

김은성 기자

정년연장과 재고용 갈등 속 한국식 고령 일자리 만들어야

고령층 취업 청년층 추월, 부익부 쏠림 막을 제도도 필요

2023년 12월 서울 마포구청에서 열린 ‘2023 마포구 노인 일자리 박람회’에서 한 노인이 구직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3년 12월 서울 마포구청에서 열린 ‘2023 마포구 노인 일자리 박람회’에서 한 노인이 구직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간경향] 정년 연장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최근 행정안전부에 이어 대구시가 공무직의 정년을 65세까지 연장키로 했다. 다른 지자체들도 정년 연장 검토에 나섰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9월 국민연금 의무가입 상한 나이를 59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이중근 신임 대한노인회장은 지난 10월 21일 노인 연령 기준을 상향 조정하자고 정부에 공식 제안했다.

민간 기업도 정년 연장 논의에 동참할 수 있을까.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지난 10월 28일 내년 1분기까지 정년 연장 합의를 끌어내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정년 연장을 연착륙시키려면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해 한국식의 고령자 일자리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기업들, 36% 정년 넘긴 직원 재고용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는 한국이 내년 초고령사회(65세 인구 비중이 20% 이상)에 진입하는 만큼 성장 동력 확보와 노인 빈곤 해소 등을 위해 고령자 고용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고용 방식을 두고는 노사 간 입장이 첨예하게 갈린다. 노동계는 60세인 법정 정년을 65세 등으로 일괄 상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임금 조정은 개별 사업장 상황에 따라 노사 간 협의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도 교섭력이 약한 사업장에선 법정 정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만큼 정년을 보편적으로 확산해 불안정 노동자들이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자는 취지다. 이에 맞춰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65세)에 따라 법정 정년을 연장하는 고령자고용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민의힘도 오는 11월 5일 정년 연장을 주제로 회의를 열고 정년을 63세로 높이는 방안을 논의한다.

경영계는 국내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감소하는 만큼 노동 공백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하지만 일괄적인 법정 정년 연장이 아닌, 자율적인 계속고용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미 일부 기업에서 시행하고 있는 ‘퇴직 후 재고용’을 선호한다. 현대자동차와 동국제강, 포스코, LG화학 등이 현장에서 필요한 인력을 정년퇴직 이후 다시 계약직으로 채용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대부분 근속연수에 따른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를 갖고 있어 법정 정년을 연장하면 기업의 임금 부담이 커진다. 퇴직 후 재고용을 하면 근속연수가 아닌 직무·성과 중심으로 근로계약을 새로 할 수 있어 인건비 부담이 줄어든다. 고용노동부는 정년 연장과 재고용을 포괄하는 계속고용(재고용·정년 연장·정년 폐지)이란 용어를 쓰면서, 계속고용을 위해 임금체계 개편 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사실상 정부가 ‘임금체계 개편이 선결돼야 한다’는 경영계 입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영계는 인건비 부담을 줄여야 청년층 신규 채용 감소 같은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재계 관계자는 “이미 일부 기업에서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숙련인력 ·전문기술자를 퇴직 후 재고용하며 정년 연장을 한다. 노사 모두 ‘윈-윈’(상호이익)할 수 있어 이런 추세가 더 확산할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높은 연봉을 조정하지 않고 일률적인 정년 연장을 하면 청년층의 취업 시장이 더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기업들도 근로자들의 평균연령이 높아져 고령화에 대한 고민이 많고, 계속고용을 위한 여러 방법 중 어느 것이 최선인지 아직 정답을 모른다”며 “직군 등의 특성에 따라 필요한 인력이 각양각색이라 기업이 자율적으로 도입을 해봐야 알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2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김위상 국민의힘 의원이 노동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정년이 넘긴 노동자를 계약직 등으로 다시 고용하는 제도’를 운용하는 사업장은 작년 말 기준 36%에 달해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2019년(28.9%)보다 7.1%포인트 상승했다.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이 자구책으로 퇴직 후 재고용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10월 7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경기도 5070 일자리 박람회에서 취업 희망자들이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0월 7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경기도 5070 일자리 박람회에서 취업 희망자들이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중소기업들도 논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중소기업 관계자는 “고령화 속도와 외국인 근로자 의존도 등을 보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할 때”라면서도 “다만 대기업보다 자본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은 정년 연장이 강제화되면 감당하지 못해 쓰러질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론과 별개로 현장에는 드러나지 않는 난제가 산적해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가 벌어져 ‘부익부 빈익빈’이 격화되는 등 사회적 불평등과 세대 간 갈등이 심화할 수 있어 섬세하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정년 연장과 청년 고용의 상관관계는 명확히 입증되지 않아 학계에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한요셉 연구위원이 ‘60세 정년 의무화가 청년 고용에 미친 영향’을 실증분석한 연구(2019)를 보면 민간부문에서는 정년 연장으로 1명의 고령 고용이 증가할 때 청년 고용은 0.2명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 결과를 보여주는 연구도 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60세 정년 연장의 고용효과에 대한 소고’ 연구(2023)를 보면 고령 고용이 1명 늘어날 때 15∼29세와 30∼44세 근로자도 각각 0.37명과 0.61명 늘었다. 보고서는 “정년 연장에 따른 중장년층의 고용 증가가 청년층의 고용 감소로 이어지지 않았다”며 “청년층과 고령층은 대체 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정년 연장, 상위 15% 위한 혜택 될 수도

다만 학술적 논란과 별개로 청년세대에서는 정년 연장이 취업 문턱을 더 높일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특히 공공부문과 금융 등 청년들이 가고 싶어하는 1차 시장(대기업·정규직) 노동자에게 정년 연장 혜택이 집중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김설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정년논의는 정년이 있고 실제 작동하는 사업장에서 일한 사람들만 해당하는 얘기다. 이와 무관한, 생계를 위해 일하는 서민들의 실질적 정년은 이미 70세를 넘어선 지 오래인데 정년 연장이 노동시장 불평등 해소와 노후 안전망을 확장하는 유일한 수단인지 의문”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1차 노동시장 중심부에 있는 일부 고령자에게만 혜택이 제한적으로 쏠릴 가능성이 있다”며 “노동관계법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의 노동권과 사회보장권을 보장해 주는 실질적인 방안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법정 정년까지 정규직 임금 근로 일자리를 유지하는 비중은 전체 고령자의 14.5%에 그친다. 정년과 실제 퇴직 연령 사이의 괴리도 크다.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기준 취업 경험이 있는 55~64세 인구는 주된 일터에서 평균 15년 근속해 49.4세에 직장을 그만둔 것으로 나타났다. 법정 정년인 60세에 훨씬 못 미친다. 여기에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63세)이 2033년 65세로 늦춰지면 ‘소득 공백기’는 더 길어진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과 법정정년이 일치하지 않는다.

60세 이상 취업자 수는 지난 9월 전체 연령대 중 1위로 올라섰다. 처음으로 50대 취업자를 제치며, 60세 이상 노동자가 고용 시장을 견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후 준비가 되지 않아 계속 일해야 하는 노인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한국 남성의 실질 은퇴연령은 2018년 기준 72.3세로 초고령사회인 일본(70.8세)보다 높다. OECD 국가 중 1위다.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해 노동시장에 더 오래 머물면서 저임금을 받으며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것이다. 소득 공백 해소를 위한 정년 연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고령화는 경제성장률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행은 지난 7월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가 올해부터 차례로 은퇴하면서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약 0.4%포인트까지 끌어내릴 수 있다”고 밝혔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생산연령인구(15∼64세)는 50년 뒤엔 현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줄어들 전망이다. 저출생·고령화의 파고를 넘을 대안 마련이 국가 경제측면에서도 시급하다는 얘기다.

노사정의 엇갈린 셈법 사이…내 정년은 언제일까

사회적 수용성·공감대부터 만들어야

고령화로 골머리를 앓는 세계 각국도 ‘정년 시계’를 늦추고 있다. 태국은 최근 사회보장기금 고갈 우려로 55∼60세인 노동자의 정년을 65세로 늘렸고, 중국도 내년부터 정년을 60세에서 63세로 올린다. 대만도 노동력 감소 등을 이유로 만 65세 정년 규정을 폐지했다. 해고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미국과 영국 등은 사실상 정년이 없다.

한국 정부는 계속고용 도입을 위한 성공적인 해외 사례로 일본을 주목한다. 일본의 법정 정년은 60세다. 1994년 60세 정년 의무화를 입법하고, 1998년 시행했다. 하지만 일본 노동자들은 원하면 70세까지 일할 수 있다. 2004년 고령자 고용 확보 조치가 의무화됐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기업이 65세까지 정년 연장, 정년 폐지, 계속 고용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재고용된 이들의 임금 수준이 저하될 경우 정부는 임금 일부를 보전해 줬다.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서 2020년에는 재고용 기한을 70세까지 늘렸다. 후생노동성의 고령자 고용상황 보고를 보면 65세까지의 고령자 고용 확보 조치를 한 기업 비율이 99.9%에 달한다. 세부적으로는 정년 폐지 3.9%, 정년 연장 26.9%, 계속고용제도 69.2%다.

일본의 정년 연장은 20년간 진행된 사회적 논의의 결과다. 세계적으로도 성공적인 노인 일자리 정책으로 꼽힌다. 다만 일본은 한국처럼 청년 실업과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 연금으로도 생활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 전문가는 일본 모델이 성공한 사회적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고,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한 고령 일자리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오학수 일본 노동정책연구·연수기구 특임연구위원은 “한국에 맞는 정년 연장을 연착륙 시키려면 고령자 고용을 확대할 수 있는 사회·제도적 수용성과 공감대부터 만들어야한다”며 “노동계는 법제화가 만능이 아님을 인정하고, 기업과 정부는 (정년을 빌미로) 임금체계 개편과 노동유연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연금 수령 연령이 올라가 노동자의 소득 공백이 생겼을 때 이를 줄여주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책무로 정년 연장 외에도 다양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며 “임금과 고용 방식은 개별 기업이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하고, 노동권 사각지대에 있는 사업장은 교섭력 차이로 정년 연장에서 차별 받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정년 연장 문제를 다루는 경사노위의 ‘인구구조 변화 대응 계속고용 위원회’는 오는 11월 12일 공익위원회를 열어 노사가 각각 제시한 정년 연장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다. 이어 12월 12일 대국민 토론회를 열고 본격적인 의제 공론화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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