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여당이 밀어붙이는 금투세 폐지 동의”
주식시장 침체·정쟁 수단 전락 등 이유로 들어
‘외연 확장’ 통한 차기 대선 도모 행보 평가
“자본이득에 눈감아 주는 세상 원하나” 비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일 내년 1월 도입 예정이던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를 폐지하자고 밝혔다. 내부 논란 끝에 결국 정부·여당의 금투세 폐지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보수 실용주의’를 앞세워 외연을 확장해 차기 대선을 도모하기 위한 행보로 평가된다. 윤석열 정부의 부자감세 기조를 비판해온 민주당의 자기모순이자 정체성 훼손이란 비판이 제기된다.
이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아쉽지만 정부와 여당이 밀어붙이는 금투세 폐지에 동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우선 주식시장 침체를 금투세 폐지 근거로 들었다. 그는 “원칙과 가치에 따르면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금투세 도입) 강행이 맞겠지만, 현재 대한민국 주식시장이 너무 어렵고, 주식시장에 기대고 있는 1500만 투자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금투세 면세 한도를 5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올리고, 손실 이연 기간을 5년에서 10년으로 늘리는 등의 대안을 고민했다면서도 “현재 대한민국 증시가 가진 구조적 위험성과 취약성을 개선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금투세가 정쟁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점도 폐지 이유로 꼽았다. 이 대표는 “정부·여당이 정책을 갖고 야당을 공격하는 정쟁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이 문제(금투세 도입)를 유예하거나 개선 시행을 하겠다고 하면 끊임없이 정쟁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원칙과 가치를 저버렸다는 진보 진영의 비난과 비판을 아프게 받아들이고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앞으로 더 많이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상법 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민주당은 증시가 정상을 회복하고 (주식시장이) 기업의 자금 조달, 국민의 투자 수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상법 개정을 포함한 입법과 증시 선진화 정책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최근 주식시장 침체 원인이 정부 정책에 있다며 윤석열 대통령에게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 이 대표는 만연한 주가조작, 우량주 장기 투자의 어려움, 불확실한 경제 산업, 군사적 긴장으로 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등을 주가 하락 원인으로 지목하고 “정부와 여당은 점점 더 시장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금투세 폐지 결정에는 ‘개미 투자자’ 등 여론의 압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은 금투세 폐지론을 당론으로 정하고 ‘금투세는 이재명세’라는 프레임으로 민주당을 압박했다. ‘금투세 폐지는 주식시장에 악재’라는 논리에 동의하는 개인 투자자들이 이 대표의 결정만 기다리게 만든 것이다. 이 대표도 지난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금투세 시행 유예론을 꺼내는 등 스스로 논란을 키웠다.
이 대표의 소위 실용주의 노선도 배경이 됐다. 그는 지난 9월 방송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보수에 가까운 실용주의자”라고 표현하며 내년 1월 금투세 도입이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최근엔 안팎에서 분출하는 윤 대통령 탄핵 촉구와 거리를 둔 채 경제인과의 접촉을 늘리는 등 ‘우클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금투세 폐지도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이 대표 엄호에 나섰다. 김윤덕 사무총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금투세 폐지 동의는 민생을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고, 줄곧 금투세 폐지를 주장했던 이소영 의원은 “당 지도부의 금투세 결정을 지지하고 환영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금투세 도입론자였던 진성준 정책위의장도 “지도부가 결단한 만큼 저 역시 당인으로서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토론회 등을 통해 여론을 모았던 민주당은 금투세 관련 결정을 지도부에 일임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진보 진영의 고유한 가치를 훼손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금투세 도입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여야 합의로 이뤄낸 결과인데 이 대표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는 지적이 주를 이룬다. 게다가 금투세는 주식 세수 체계를 투명하게 해 자본시장실명제 역할을 할 것이란 평가도 많다. 주식 투자자의 99%는 금투세와 상관없는 것도 현실이다. 익명을 요청한 수도권 3선 의원은 통화에서 “‘소득이 있는 곳에 과세한다’는 대전제를 무시한 결정”이라며 “금투세 도입도 해내지 못했는데 더 큰 과제인 상법 개정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조국혁신당은 입장문을 내고 “민주당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이 불합리한 세제를 그대로 둔 채 자본이득에 눈감아주는 그런 세상인가”라며 “2년 연속 대규모 세수 펑크로 경보가 울리고 증권거래세도 폐지되는 마당에 금투세까지 폐지하면 이 대표의 대표 철학인 기본소득 정책은 어떻게 추진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날을 세웠다. 진보당도 “금투세 폐지의 혜택은 상위 1%의 슈퍼개미가 누리게 된다”며 “자산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또 한 번의 부자 감세를 시행한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