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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의 새 동반자 ‘문 앞의 시민들’…이젠 관계 정립할 때

입력 2024.11.05 20:00

수정 2024.11.0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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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

1989년 미국에서 출간된 논픽션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은 차입매수(LBO·자금을 빌려 회사를 사들이는 것) 열풍이 불던 1980년대 미국 인수·합병(M&A) 시장을 생생하게 그린 베스트셀러다.

당시 미국 최대 식품 및 담배회사였던 RJR 나비스코의 최고경영자(CEO) 로스 존슨은 자신을 위해 월스트리트 최대 규모의 차입매수를 기획했지만, 결국 로스 존슨이 제시한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써 낸 다른 투자자 KKR이 승리하면서 회사를 인수하고 로스 존슨은 퇴임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 기반 대기업을 자금력으로 인수하는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을 ‘야만인(barbarian)’이라고 부른 유명한 제목 덕분에 금융자본의 기업 인수가 있을 때마다 단골로 언급되는 책인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공개매수를 통한 기업 인수 시도가 등장하면서 재소환되고 있다.

그런데 35년이 지난 지금, 2024년의 한국에서는 M&A를 위해 기업의 문 앞에서 노크하는 금융자본보다 더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두산그룹 구조 개편부터 금융투자소득세 문제, 삼성전자 주가 폭락, 고려아연 공개매수와 유상증자까지….

이런 자본시장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의견을 표출하고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과거 제한된 채널 밖에 없던 미디어 환경에서는 보이지 않던 보통 사람들, 운을 맞춰 부르면 civilians, 즉 시민들이다.

‘문 앞의 시민들(Civilians at the Gate)’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고, 다양한 영상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밝히며, 또 정부의 조치를 촉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실을 알리며 행동하고 있다.

2020년 LG화학 물적분할은 우리나라에 이런 ‘시민들’이 등장했음을 알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는 결국 물적분할 관련 제도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정부가 각종 제도 개선을 추진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과거에도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비슷한 역할을 담당해 왔지만, 새로 등장한 자본시장의 시민들은 어떤 단체에 소속되거나 조직되어 있지 않은 대중 그 자체다. 이들은 거래에 따른 경제적 이익과 손해를 정확히 알고, 공정한 규칙이 없다고 생각할 때 목소리를 내는 시장의 강력한 감시자가 되어 가고 있다.

이제 한국 기업들은 이렇게 새로 등장한 ‘문 앞의 시민들’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 과거 외국계 헤지펀드가 찾아왔을 때처럼 이들을 적대시하거나, 혹은 단순히 ‘달래야 하는’ 소액주주로 여겨서는 이 흐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통 채널을 혁신하고, 실질적인 피드백을 반영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새로운 관계 정립은 단기적으로는 기업의 부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관계는 장기적으로 시장과 소비자로부터의 강한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핵심 열쇠가 될 것이다. 신뢰는 비용을 줄인다. 그리고 회사의 가치를 높인다. 이제 한국 기업들에 필요한 것은 이러한 시민들을 함께 성장할 중요한 이해관계자로 생각하는 인식의 전환이다.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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