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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KIA 타이거즈의 정규시즌·한국시리즈 통합우승으로 2024년 프로야구도 마무리됐습니다. 올해 KBO리그는 한국 프로 스포츠 최초로 1000만 관중을 동원하며 어느 때보다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2030 여성 팬들이 늘어나며 리그도, 각 구단도 흥행에 성공했죠.

경향신문의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30대 여성 기자가 야구 붐을 바라보는 짧은 연재 “‘얼빠’ 아니고 ‘야빠’인데요”를 시작합니다. 안타가 뭔지도 모르던 ‘야알못’이 어떻게 ‘야빠’가 되었는지, 야구장 ‘큰 손’이 된 여성 관객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지 함께 이야기 나눠 봤으면 합니다.



‘40년 고인 물’ 아저씨 팬이 말했다 “크보는 여성 팬에게 투자하라!”[‘얼빠’ 아니고 ‘야빠’인데요②]

야구를 보기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야구 팬들이 정말 정말 많다는 사실이요. 제가 아는 사람의 절반 정도는 ‘야빠’더군요. 정규시즌 때면 홈과 원정 경기장을 가리지 않고 ‘직관’을 가는 과몰입 대장부터, 경기를 챙겨보진 않아도 그날의 결과와 뉴스는 빠뜨리지 않는 팬들까지 응원하는 팀도, 응원하는 방식도 다양했습니다.

회사의 홍 모 선배도 그랬습니다. 홍 선배와 처음 점심을 먹은 5월 어느 날, 얘깃거리를 찾다가 역시나 화제는 야구로 넘어갔습니다. 그 전주 금토일, 제가 응원하는 NC 다이노스는 LG 트윈스와의 주말 3연전에서 완패했어요. (저는 그중 이틀을 잠실야구장에서 봤고.. 분노의 눈물을 흘렸고..)

알고 보니 홍 선배는 한국 프로야구(KBO) 리그가 개막한 1982년, LG 트윈스의 전신인 MBC 청룡 시절부터 응원한 ‘40년 고인 물’(스스로 칭한 표현입니다) 아저씨 팬이었습니다.

“여성 팬 늘면서 야구장 분위기도 가족 친화적으로 바뀌어”

한국프로야구 2024 KBO리그가 역대 한 시즌 최다 관중 신기록을 세운 8월 18일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경기를 찾은 관중들이 서울 잠실야구경기장에서 응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프로야구 2024 KBO리그가 역대 한 시즌 최다 관중 신기록을 세운 8월 18일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경기를 찾은 관중들이 서울 잠실야구경기장에서 응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LG는 1994년 이후 무려 29년 만에 정규시즌·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제가 야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때에도 ‘엘롯기’는 들어봤어요. LG 트윈스, 롯데 자이언츠, KIA 타이거즈 3개 구단의 첫 글자인데요. 팬도 많고 역사도 오래된 이들이 오랫동안 하위권에 머무르는 것을 자조하며 생긴 표현입니다.

어릴 때부터 지켜보며 응원한 팀이,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울 때까지 한 세대가 훌쩍 흘러 마침내 우승한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요. 이제 막 야구를 보기 시작한 저는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벅차오르는데 말이죠.

그런데 KBO의 산 증인(?)인 홍 선배는 “지난해 우승 때 기분이 어떠셨냐”는 질문에 의외로 담담하게 답했습니다.

“당연히 좋긴 했는데, 그보다는 우리한테는 설움이랄까 한이랄까 이런 게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감격이라기엔, 하하. 한국시리즈도 전부 집에서 중계로 봤어요. 물론 티켓 구하기가 어려운 것도 있지만… 너무 추울 것 같아서.”

“네? 추워서요?”

선배가 털어놓은 ‘고백 아닌 고백’은 이랬습니다.

“사실 야구장은 거의 안 가요. 이제는 아이들이 응원하는 팀을 따라가긴 하지만요. 아저씨들은 야구를 오래 봤을진 몰라도 정작 구단엔 도움이 안 돼요. 여성 팬들이 확실히 야구장도 많이 가고, 그만큼 돈도 많이 쓰고… 그러니까 장기적으로 보면 구단이나 KBO는 여성 팬들한테 투자하는 게 맞죠.”

지난 3월 24일 한화 이글스와 LG 트윈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서울 잠실야구장을 찾은 홍 선배와 아이들. 홍 선배는 LG 팬이지만 두 아이는 각자 한화와 KIA를 응원한다. 응원하는 팀이 다르다 보니 집에선 종종 ‘TV 쟁탈전’도 벌어진다. 사진 본인 제공

지난 3월 24일 한화 이글스와 LG 트윈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서울 잠실야구장을 찾은 홍 선배와 아이들. 홍 선배는 LG 팬이지만 두 아이는 각자 한화와 KIA를 응원한다. 응원하는 팀이 다르다 보니 집에선 종종 ‘TV 쟁탈전’도 벌어진다. 사진 본인 제공

물론 아저씨 팬이라고 다 선배처럼 ‘집관’을 선호하는 건 아닙니다. LG만 해도 매년 경기장에 빗자루를 들고 다니며 응원하는 것으로 유명한 ‘빗자루 아저씨’가 있고요, 롯데 ‘쌍깃발 아재’나 키움 히어로즈 ‘밀저씨’ 등등 열혈 아저씨 팬들은 어디에나 있죠. 굿즈를 사 모으거나 선수 사인볼을 수집하는 이들도 당연히 많고요.

그런데 선배가 ‘여성 팬들에게 공을 들여야 한다’고 말한 건 왜일까요. 선배는 여성 팬이 늘어나면서, 그러니까 팬들의 ‘색깔’이 다양해지면서 “야구장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고 편안해진 것 같다”고 돌아봤습니다.

“요즘 야구를 보면서 놀란 건 관중석에 해당 경기와 상관없는 다른 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는 거예요. 옛날에 야구장이 거칠고, 전쟁 같은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승부에 집착하기보다 야구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느껴요. 이런 분위기여야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망설이지 않고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고, 그 아이들이 또 야구 팬이 되겠죠.”

“여자는 어디 팬이 예쁘다”…아직도 이런 말이

팬들의 이런 인식 변화와는 다르게 야구판은 아직도 철저하게 ‘남성의 스포츠’로 남아 있습니다. 후배 한 명은 스포츠 분야를 취재하는데요, 여러 종목 중에서도 야구는 싫다고 했습니다.

“경기가 너무 정적이고, 진행 시간도 길고, 중간에 광고도 너무 많고, 경기장은 일회용품 쓰레기 천지고, 결정적으로 여자 프로 리그가 없어서요.

KIA 팬들이 10월 23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24 신한 SOL뱅크 KBO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 2차전 삼성 라이온즈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에서 응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KIA 팬들이 10월 23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24 신한 SOL뱅크 KBO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 2차전 삼성 라이온즈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에서 응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구는 축구·농구·배구와 함께 국내 4대 구기 종목인데요. 여자 프로 리그가 없는 건 야구 뿐입니다. 미국은 최근 여자프로야구리그(WPBL)를 2026년에 출범한다고 하지만, 한국은 실업 리그조차 운영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학교 여자 야구부도 없었고요. 선수가 없으니 코치도, 감독도 없습니다.

야구장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아주 엄격히 구분됩니다. 남성은 ‘선수’, 여성은 ‘팬 아니면 치어리더’요. 올림픽도 선수 구성을 남녀 동수로 하는 2024년에, 새삼 이상하고 낯선 풍경입니다.

경기 중계를 보면 중간중간 카메라가 관중석을 비추죠. 스케치북에 응원 문구를 써서 들고 있는 사람, 유니폼과 각종 응원 도구를 흔드는 사람, 뭔가를 먹고 마시는 사람… 매일 전국 5개 구장에서 열리는 야구 경기에서, 시구·시타 행사부터 게임 종료 때까지, 이렇게 중계에 잡히는 관객 중에서 여성과 남성 비율은 얼마나 될까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을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일부 스포츠 커뮤니티에서는 ‘어느 구단 팬들이 어느 구단 팬보다 예쁘다’, ‘못생긴 여자 팬들은 스케치북 들지 말라’는 식의 외모 품평이 줄을 잇습니다. 치어리더를 향한 성희롱 발언이나 성적 비하도 비일비재합니다.

지난 6월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경기를 보고 나오는 길. 김정화 기자

지난 6월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경기를 보고 나오는 길. 김정화 기자

더 큰 문제는 이런 시각이 일부 팬들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잊을만 하면 팬들을 향한 몰지각한 중계와 해설이 등장합니다. 2022년 5월 NC와 SSG 랜더스의 경기에선 귀를 의심하게 하는 캐스터와 해설위원의 중계 발언이 있었습니다.

“여성 팬들은 안타인 줄 아셨던 것 같은데요. 파울이었습니다.” (김수환 캐스터)

“여성분들은 일단 (배트에 공이) 맞으면 환호하죠.” (박재홍 해설위원)

지난 8월 한화 이글스와 KT 위즈의 경기에선 ‘여자라면 최재훈’이라는 문구를 적은 관중석의 스케치북이 화면에 잡혔는데요. 이기호 캐스터가 “저는 여자라면이 먹고 싶은데요”, “가장 맛있는 라면이 아닙니까”라고 발언해 즉각 대기발령 조치되는 일도 있었죠.

KBO에서 여성 팬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건 수년 전부터 나온 얘기입니다. 경기 관람 횟수도, 야구장 재방문율도, 유니폼 구매율도, 모두 여성이 높습니다. 여전히 여성들이 남성 선수들을, 남성 중계진을, 남성 팬들을 위해 들러리 서는 것처럼 여기는 이 문화, 언제쯤 바뀔까요? 여성 팬을 ‘스포츠 관중’으로 보는 게 어렵다면, 적어도 돈 쓰는 만큼이라도 대우하면 좋겠습니다.

▼ 김정화 기자 clean@khan.kr

“‘얼빠’라서 그렇다”, “룰도 모르면서 인증샷 찍으려고 온다”, 야구 보는 여성이라면 한 번쯤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을 텐데요.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또는 직접 뛰고 운동하면서 겪은 불합리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아래 링크에 남겨주세요. 우리 함께 이야기 나눠봐요.

구글 폼 링크 ( https://t.ly/lm3E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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