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외벽 탄 ‘장발장’···그는 12년간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김혜리 기자

사업실패·사고로 가족과 연 끊고 노숙

법원 실종선고로 12년간 사망자 간주

복지 지원 못 받은 채 살다 배고파 범행

사연 접한 피해자들 “처벌 원치 않아”

검찰, 갱생 프로그램 조건 ‘기소유예’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정문.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정문. 경향신문 자료사진

검찰이 8년 동안 서울대 건물 외벽을 타고 내부에 침입해 현금을 훔친 노숙인을 기소유예 처분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장검사 김승호)는 지난달 말 야간건조물침입·절도 등 혐의로 구속 송치된 A씨(67)를 이날 조건부 기소유예 처분했다고 8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016년부터 올해까지 서울대 연구실, 교수실, 사무실 등에 몰래 침입해 총 9차례에 걸쳐 219만원 상당의 현금 및 상품권을 훔치거나 훔치려다가 미수에 그친 혐의를 받는다. 지난 8월 학교 측 신고가 접수된 후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고, 폐쇄회로(CC)TV 등을 분석해 A씨를 검거했다.

검찰에 따르면 A씨는 사업실패 이후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면서 일용직 노동조차 할 수 없게 되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관악산에서 수년간 노숙생활을 해왔다. 이 사건 범행도 노숙하던 중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수사 과정에서 A씨는 약 12년 전 법원으로부터 실종선고를 받아 사실상 사망자로 간주돼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지원 등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서울대 교수 등 피해자 10명은 A씨의 사연을 접한 후 “A씨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며 처벌 불원 의사를 표시했다. A씨도 갱생보호 프로그램 이수에 동의했다.

검찰은 A씨가 실종 선고를 받았음을 확인하고 지난달 31일 법원에 이를 취소해달라고 요청했다. 법원은 지난 5일 이를 받아들여 A씨의 실종 선고 취소 청구를 인용했다. 검찰은 주거·취업을 지원하는 등 A씨에 대한 갱생보호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로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과 협의하고, 취업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조건으로 이날 A씨를 기소유예 처분했다.

A씨는 검사실에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터전에서 열심히 한 번 살아보겠다. 보답하는 길은 다시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바르게 살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앞으로도 피의자가 범행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경위 등 사안의 구체적 사정을 세심히 살펴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적정한 처분을 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며 “사건관계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따뜻한 검찰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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