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박(柳璞)과 화품(花品)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어느 시대나 덕후는 있게 마련이다. 좋아하는 것에 꽂혀 모든 걸 쏟아붓는 열정은 옛날이라고 다를 리 없다. 조선 후기 꽃에 꽂힌 덕후가 있었으니, 황해도 배천의 금곡 출신 유박이다.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 벼슬의 꿈을 버리고 서해 바닷가에 백화암이라는 정원을 짓고 평생을 살았다. 돈만 생기면 꽃에 몰빵하며 외국산 꽃도 마다하지 않았다. 채제공과 유득공 등 당대 문인들도 앞다투어 그의 화벽(花癖)에 관한 글을 남겼다. 당시에는 꽃의 모습과 생리, 운치와 상징성 등을 기준으로 꽃을 품평하는 것이 유행했다.

꽃에 관한 유박의 생각은 직접 집필한 <화암수록>(번역본은 정민 등이 옮김, 휴머니스트)에 실렸다. 맨 앞부분에는 꽃에 등수를 매겨 품평한 ‘화목구등품제’가 등장한다. 또한 22종의 꽃에 대한 ‘화품평론’도 이어진다. 조선 초기 <양화소록>을 쓴 강희안도 이와 유사한 ‘화목구품’을 논하였다.

조선시대 관리 품계 등급을 나누듯 그는 꽃을 9등급으로 나누고, 각각 5종씩 총 45종의 꽃을 선별했다. 1등인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 소나무 등을 시작으로, 9등 접시꽃, 동자꽃, 금전화, 석창포, 회양목 등을 열거했다. 은행나무, 철쭉 등은 9등 안에 들지 못했다. 그의 안목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화목구등품제’를 생각하면, 언뜻 대학입시 수능 9등급제가 떠오른다. 우리는 1등급만을 우러러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수능 등급에 따라 미래와 서열이 정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니, 온 국민이 사생결단이다. 유박은 1등급인 매화를 다른 꽃들과 함께 두는 것을, ‘훌륭한 선비와 보통 사람을 나란히 세워둔 꼴’이라 하며, 1등급 꽃 옆에 다른 꽃들을 범접하지 못하게 했다. 마치 우리 사회를 보는 듯하다. 조선의 문신 목만중은 화품과 인품이 서로 같다 했으니, 본의 아니게 우리도 꽃이 되어 이 사회의 품평을 받고 있다.

우리는 상대적 서열화에 익숙해져 있다. 학벌과 전공, 외모와 능력, 심지어 인종과 문화도 그렇다. 최근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서열을 정해 괴롭히는 드라마까지 등장했다. 수직적 우열은 종속적 관계의 씨앗이 될 수 있으므로, 특히 어린 학생들에게는 매우 가혹하다. 더욱 불행한 것은 거기에 누구도 토 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1등의 매화와 국화가 되라’고 부추긴다.

우리 모두 구등품 안에 들지 않아도 좋다. 들판 한구석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도 가슴을 울린다. 어디 매화만 꽃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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