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연동리 양천종씨로 확인
광주형무소서 수감 중 사망 통보
옛 광주형무소 부지에서 발견된 유해 중 1구가 제주4·3사건 희생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희생자는 4·3 당시인 1949년에 광주형무소로 끌려간 후 75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올수 있게 됐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로부터 받은 광주형무소 옛터 발굴 유해의 유전자 정보를 4·3 희생자 유가족의 유전자 정보와 대조한 결과 1구의 신원이 제주도민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12일 밝혔다.
이 유해는 제주시 연동리 출신의 고 양천종 씨다. 양씨는 4·3 당시 집이 불에 타자 가족들과 함께 제주시 노형리 골머리오름에서 피신 생활을 하다가 1949년 3월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토벌대의 선무공작으로 귀순했다. 4·3 당시 민간인 수용소로 쓰인 제주시 주정공장에서 한 달여간 수용 생활을 한 후 풀려 났으나 같은 해 7월 농사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다시 체포돼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양씨는 광주형무소에서 수감돼 재판을 기다리던 중 옥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은 1949년 11월쯤 “형무소에서 잘 지낸다”는 내용의 안부 편지를 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양씨와의 연락이 끊겼다. 이후 가족들은 같은 해 12월4일자로 광주형무소로부터 사망 통보를 받았다. 당시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밭을 팔아가며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유해를 찾지 못했다.
양씨의 손자 양성홍씨(77)는 “한국전쟁 끝나고 어머니가 (대전형무소로 끌려간)아버지와 할아버지 시신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돈만 날리고 찾지 못해 한스러워하셨다”면서 “생존하시는 고모님이 부친의 시신을 찾게 돼 너무 기뻐하신다”고 말했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형무소터 무연분묘에서 발굴된 261구의 유해 중 하나다. 광주형무소에는 4·3과 관련해 제주도민 180명 안팎이 수감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4·3평화재단 관계자는 “광주형무소가 1971년 북구 문흥동으로 이전할 당시 기존 교도소의 무연분묘도 함께 옮긴 것으로 보인다”면서 “제주도민 유해가 더 확인될지 아직은 모르겠다”고 말했다.
희생자의 유해는 오는 12월16일 유가족에게 인계된다. 유족회 주관으로 제례를 지낸 후 화장하고 12월17일 항공편으로 제주로 봉환한다. 이후 제주에서 봉환식과 신원확인 보고회를 거행한다.
이번 신원확인은 제주도와 4·3평화재단이 4·3 당시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끌려가 행방불명된 제주도민을 찾기 위해 추진 중인 ‘도외 지역 발굴유해 유전자 감식 시범사업’ 과정에서 이뤄졌다. 제주도 관계자는 “서울대 법의학교실에 의뢰해 채혈한 4·3유가족과 발굴 유해간 유전자 감식을 진행 중”이라면서 “지난해 대전 골령골에서도 1구의 유해가 4·3 당시 대전형무소로 끌려간 희생자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한편 4·3 당시 제주에는 형무소가 없어 군경에 잡혀 온 도민들이 제대로 된 재판절차도 받지 않은 채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뿔뿔이 흩어져 수감됐다. 이들 상당수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치범으로 간주돼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국 형무소에 수감됐던 4·3 관련 재소자 2500여명은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 처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