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전 대통령이 4년 만에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많은 이들이 그가 한국에 내밀 과도한 계산서를 우려하지만, 한편으론 그가 전운이 감도는 한반도를 안정시키는 데 절실히 필요한 대화를 공언했기에 어느 정도 기대도 있다. 물론 상황은 녹록지 않다. 북·미관계는 트럼프가 비핵화 협상을 벌였던 1기 재임 시절과 많이 달라졌다. 그사이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이 더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비핵화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2022년 9월 핵무기 보유를 법제화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우리의 핵을 놓고 더는 흥정할 수 없게 불퇴의 선을 그어놓은 여기에 핵 무력정책의 법화가 갖는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북한은 사회주의 몰락 이후 30년간 추구해온 ‘워싱턴을 통한 활로 모색’이란 생존전략을 포기하였다. 대신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재래식 군수물자 부족에 허덕이던 러시아에 대량의 재래식 무기 제공 기회를 포착하면서 어렵지 않게 ‘북방과의 국제협력을 통한 활로 모색’으로 생존전략의 전환을 이뤄냈다. 현재 북한은 러시아에 병력 지원을 통해 확보한 생존통로를 다지고 있다.
이제 북한은 살아남기 위해 미국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러니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한 미국의 대화 제의는 수용치 않을 것이다. 협상 조건이 까다로워진 것이다. 과연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가 빠진 북·미 협상을 추진할진 미지수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가 트럼프가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일단 북·미 대화를 추진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한다.
북·미 대화는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추진 자체가 특히 긴장된 남북관계를 반전시킬 요소들을 긍정적으로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남북관계의 안정에 대한 미국 외교의 관심이 커질 것이며, 남북한 지도자들은 무절제한 도발 심리를 어느 정도 자제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북·미 대화의 여건 마련을 위해 남북관계에서 긴장 고조 행위를 자제할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 해빙 국면을 원하는 트럼프 정부로서는 윤석열 정부의 대북강경정책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기에 윤 정부의 대북정책도 불가피하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윤 정부에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요구하는 여론 압박도 커질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남북관계에서 역대 정부와 다른 두 가지 특이점을 가졌다. 첫째, 윤 정부는 남한이 먼저 북한을 자극해 남북관계를 위기에 빠뜨린 초유의 정권이다. 주지하듯 윤 정부가 일부 탈북민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방임하면서 남북관계에서 현재진행형의 위기 고조 상황이 만들어졌다. 둘째, 윤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요즘 대통령 부부와의 관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인사는 윤 대통령을 가리켜 “다섯 살짜리 꼬마가 지금 총 들고 있는 격”이라 말했다. 언제 충돌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격렬한 남북갈등으로 간이 쪼그라든 많은 이들이 느끼는 감정을 사적 측근이 말로 하니 두려울 따름이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아찔한 시대에 우리가 사는 것이다. 남북 간 전쟁과 충돌을 방지할 수 있는 조치나 분위기 조성이 절실한 또 다른 이유다.
윤석열 정부에 대북정책 전환을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지만, 그래도 상황이 엄중한지라 헛심 쓰더라도 제언한다. 윤 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안보리스크를 줄이며 북·미 대화 가능성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과감하게 남북대화를 추진하길 바란다. 지금과 같이 극단적인 대결 상황에서 대화 제의가 가당키나 하나 싶겠지만 해볼 만하다. 다만 윤 정부가 대화 여건 조성 차원에서 먼저 접경지 주민의 생명과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대북전단 살포를 반대하고, 이를 막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보여야 한다. 그 뒤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한 장치 마련을 위해 남북대화를 제안하라.
윤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을 죽이려 무장게릴라를 청와대에 파견했던 북한 지도부와 대화하였다. 그는 강경한 반공주의자였으며 통일에 대한 신념도 희박했지만 1970년대 초반 미·중 데탕트라는 국제정세에 대처해 남북대화를 추진하였다.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낸 고 김성진은 생전 ‘박 대통령은 북한의 군사력이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남북대화가 유용한 전략이 되리라고 판단했다’고 증언했다. “적어도 한쪽 손이라도 서로 붙잡고 있으면 적이 공격해올 것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알 수 있다.” 김성진이 전하는 박 전 대통령의 말이다. 적대적으로 대결 중인 상대와도 국가안보를 위해 대화가 필요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