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성공회(국교회)가 수 십년 동안 이어진 아동 성학대 사건을 은폐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사임 압박을 받던 최고 성직자가 결국 물러났다.
12일(현지시간) 영국 BBC와 가디언에 따르면 캔터베리 대주교 저스틴 웰비는 이날 성명을 내고 성공회에서 벌어진 “극악무도한 학대”에 충분한 조치를 다 하지 못했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웰비 대주교의 사임 결정은 교회가 1970년대부터 발생한 대규모 아동 성학대 사건을 은폐했다는 조사 보고서가 나온 지 5일 만이다. 성공회 대주교회의 의뢰로 구성된 독립 조사 위원회는 지난 7일 보고서를 통해 교회에서 활동하던 변호사 존 스미스의 아동학대 혐의를 교회가 감췄다고 폭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스미스는 1970~1980년대 영국에서 교회 여름 캠프를 운영하는 등 관련 활동을 하면서 만난 아동과 젊은 남성 30여명을 성적, 신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이후 아프리카로 이주해서도 약 100명에 이르는 청소년을 학대한 의혹을 받는다. 2017년 다큐멘터리 방송을 통해 이런 의혹이 알려져 경찰 수사가 시작됐지만, 바로 다음 해에 스미스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망하면서 기소 전에 사건이 종결됐다.
그간 웰비 대주교는 이런 의혹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사위원회는 그를 포함한 일부 교회 지도자가 적어도 2013년에 해당 사건을 인지했지만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스미스가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범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보고서가 발표된 직후 웰비 대주교를 향한 사임 압박이 거세졌다. 그는 “학대가 발생한 것은 유감”이라면서도 사임 요구엔 선을 그었는데, 교회 안팎에서 물러나라는 요구가 빗발치자 결국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영국 성공회의 의회격인 시노드 대의원 3명이 웰비 대주교 사임을 촉구했고, 사건 피해자도 나서 목소리를 냈다. 웰비 대주교 사임 요구서에는 이날까지 약 1만3000명이 서명했다. 사임 발표가 나오기 직전에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피해자들이 제대로 구제받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웰비 대주교의 사임으로 사건이 일단락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스미스의 학대 사건에 관한 책을 쓴 앤드루 그레이스톤은 “최소 11명의 주교가 스미스 학대 사건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막지 못했다”며 “교회의 특권과 지도층 문화가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스미스 사건의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앨런 콜린스 변호사는 “교회가 피해자들의 요구에 충분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웰비 대주교의 후임자를 찾는 과정은 적어도 6개월이 걸릴 예정이라고 BBC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