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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거나 떠도는 것이 운명을 결정한다

[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머무르거나 떠도는 것이 운명을 결정한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종류는 약 200종이나 되지만, 이들을 정착의 여부로만 보면 부착성 세포(adherent cell)와 부유성 세포(suspension cell), 단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부착성 세포는 말 그대로 특정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 서로 결합해 못 박힌 듯 자리를 고수하는 세포들이다.

사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 대부분은 부착성을 가진다. 그렇지 않으면 몸을 제대로 유지하거나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혈관을 구성하는 세포들이 단단히 결합하지 않으면 혈관에 구멍이 나기 십상일 테고, 복강 내 내장기관이나 근육층 내부에서 머리카락이나 치아가 자라나는 상황은 상상조차 끔찍하다. 이처럼 자리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에, 부착성 세포들은 제자리에서 떨어지면 사멸하기 마련이다. 부착성 세포에게 정착은 그 자신과 몸 전체의 유지를 위해 반드시 고수해야만 하는 운명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세포들이 그렇게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세포들 중에는 절대로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늘 떠돌아다니는 세포들도 있다. 혈액을 구성하는 적혈구를 비롯한 면역세포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신체의 모든 세포들에 산소와 영양분을 전달하고, 몸 구석구석으로 숨어든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지라,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한다. 이들의 머무름은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적혈구가 뭉친 혈전이 혈관벽에 달라붙어 정지하면, 혈관벽이 막히거나 심하면 파열되어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이렇듯 세포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과 기능에 따라 정착하거나 유랑하는 두 가지 운명을 지니고 평생을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일이다.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들은 동일한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유전정보에는 부착성 유전자와 부유성 유전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각각의 세포들은 자신의 처지와 역할에 따라 각각 한쪽의 유전자는 봉인하고 평생을 살아가며, 이렇게 한 번 꺼버린 유전자 스위치를 다시 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생물학이 흥미로운 건 모든 규칙에 언제나 예외가 있다는 것이다. 세포 중에는 부착성 유전자와 부유성 유전자의 스위치를 자유롭게 켜고 끄는 세포가 있다. 처음에는 부착되어 자라던 세포가 갑자기 부유성 유전자를 활성화시켜 제자리를 이탈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더니, 다시 부착성 유전자를 켜고 전혀 다른 부위에 안착해 정주하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쯤 되면 문득 떠오르는 세포가 있지 않은가. 바로 암세포다. 체내에서 불필요한 세포덩어리들을 만드는 양성 종양과 악성 종양(암)을 구별하는 뚜렷한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양성 종양은 처음 생긴 그 자리에 머물 뿐이지만, 암세포는 부착과 부유의 생활사를 번갈아 유지하며 신체 여기저기로 퍼져나갈 수 있다. 이런 암세포의 전이 현상은 암 치료를 어렵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한 곳의 암세포들을 제거해도 이미 혈관을 통해 암세포가 부유하기 시작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체의 다른 부위에 또 암이 재발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암으로 사망한 환자 10명 중 9명은 처음 발생한 원발암(primary cancer)이 아니라 원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해 정착한 전이암(Secondary cancer)으로 사망할 정도로, 암세포의 이주는 치명적이다. 그런데 이는 거꾸로 말하면, 암세포가 이동해 전이하는 것만 막아도 암으로 인한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현재까지 E-cadherin, Integrins를 비롯해 암세포의 부착과 이동에 연관되어 있는 수십종의 유전자들이 밝혀져 있고, 또 밝혀지는 중이다. 이들의 활성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다면, 암세포가 형성되는 것 자체를 막지는 못해도 암세포의 전이는 막을 수 있으므로 완치 가능성을 확실히 높일 수 있다. 현재 연구 중인 차세대 항암제 중 암의 전이를 막는 유전자 접근법을 이용한 방식들이 많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은 현재의 인류가 5만년 전 호모사피엔스 조상들과 하나의 종으로 묶이면서도 판이하게 다른 생활상을 보이는 주된 이유를 1만년 전 즈음에 시작한 농업혁명과 정착 현상 때문이라 말한다. 정착과 거주는 단순히 내일 밤 어디서 묵을지 결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역사적 흐름 자체를 바꿔놓은 거대한 변화다. 그리고 그건 세포도 사람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은희 과학저술가

이은희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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