쩍쩍 갈라져 있던 낡고 오래된 붉은 벽돌의 아파트 담벼락이 플라스틱 병뚜껑 10만개를 엮어 만든 높이 1m, 너비 120m의 대형 벽화로 재탄생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표현한 이 벽화에는 ‘지속 가능한 환경을 함께 만들자’는 주민 3000여명의 바람이 담겼다.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 중흥2단지아파트 담벼락에는 지난 9일 빨강·주황·초록·노랑 등 8가지 색상의 플라스틱 병뚜껑 10만개가 부착됐다. 작업에는 학생과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중증장애인 노동자 등 주민 300여명이 참여했다.
‘지구를 살리는 십만양병 벽화’라고 이름 붙여진 이 사업은 치평동·광천동·화정1동·화정3동 등 4개 동 주민자치회가 주축이 돼 시작됐다. 박태봉 치평동 주민자치회장은 “한 번 쓰고 버려지는 플라스틱 병뚜껑으로 재활용 등 환경의 중요성을 알리고 주민 참여도 도모해 보자는 취지에서 벽화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 사업을 위해 지난해부터 30여 차례 모여 머리를 맞댔다고 한다. 광주 최대 번화가인 상무지구에 위치해 있다는 상징성과 1997년 지어진 가장 오래되고 거주자가 많은 아파트라는 점에서 이곳 담벼락에 벽화 작업을 하기로 지난해 12월 의견을 모았다.
주민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4개 동 1000여 가정, 3000여 명은 플라스틱 병뚜껑 모으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4월부터 지난달까지 7개월 동안 진행된 이 캠페인에는 1가구당 약 100개씩 총 10만여 개의 플라스틱 병뚜껑이 모였다.
벽화는 예술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광주예술고등학교 미술 전공 학생 50여 명이 도안을 제작했다. 이 학생들은 부모 등을 통해 이 사업을 알게 됐고 도움이 돼보자는 취지에서 도안 제작을 자처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교사 2명의 지도 하에 자연의 소중함을 숲과 나무 등 아름다운 사계절로 표현한 초안을 먼저 제작했다. 이후 인공지능(ChatGPT)을 활용해 단순화 과정을 거친 뒤 최종 도안을 완성했다.
벽화 제작이 학생 등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지다 보니 사업비도 구비 1000여만원 밖에 들지 않았다. 사업비는 마을 곳곳에 배치한 플라스틱 병뚜껑 수거함과 담벼락에 붙이는 아크릴판, 접착제 등 구매하는데 주로 쓰였다.
일대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어둡고 칙칙했던 긴 담벼락에 알록달록한 색이 채워지다 보니 마을 분위기가 한층 밝아진 것 같다고 주민들은 입은 모은다. 학생 박민환군(15)은 “평소 이 거리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 삭막한 느낌이었는데, 벽화가 들어선 뒤 호기심 때문인지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것 같다”고 밝혔다.
이 벽화는 현재 막바지 작업이 진행 중이다. 수백 명이 제작 손을 보태면서 벽화가 들쑥날쑥한 탓이다. 현재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병뚜껑이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도록 접착력을 보강하고 있고, 한정된 색을 대신해 벽화의 표현력을 어떻게 더 높일지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다. 오는 12월에는 더 완성도 높은 벽화를 선보인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서구는 이 벽화 사업 통한 재활용품 수거율 등 호응도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다른 동으로의 확대를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김이강 서구청장은 “벽화 제작을 위해 함께 노력해 준 4개동 주민들에 감사하다”며 “작은 병뚜껑이 모여 큰 벽화가 되듯 작은 실천이 탄소중립과 함께 지속 가능한 도심 환경을 만드는 변화의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