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옆에도 사람이 있다
1993년 개통된 홍콩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에스컬레이터이다. 총 800m 길이로 18대의 에스컬레이터와 3대의 무빙 워크로 이어져 있다. 에스컬레이터 중간마다 여러 개의 출구가 있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도 가능하다. 매일 수천명이 이용하는 이 기계는 홍콩의 혁신을 상징한다. 홍콩의 가파른 지형을 보완해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고 홍콩 시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에스컬레이터 주변의 식당과 바, 아기자기한 상점들은 자연스레 관광지가 되었다. 왕가위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찾았다. 거대한 쇼핑몰과 고풍스러운 건물이 보이고 빼곡하게 놓인 노상 식당의 테이블들 사이로 즐겁게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소호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탄 순간, 저 멀리서 둥글게 말린 어깨가 보였다. 한 사람이 문 닫힌 가게 앞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잠을 청하는 청소노동자였다. 그 옆에는 신발과 청소도구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휴식시간이리라. 그런데 왜 그는 계단 위에서 잠을 청해야만 하는 것일까.
자동화의 상징으로 보이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이 거대한 기계 어딘가에 사람이 있다. 기계를 켜고 끄는 일에는 사람이 필요하다.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잇는 출구와 함께 이어지는 계단에 쌓이는 먼지와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에도 사람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명소에는 방문객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장소를 관리하는 누군가의 노동이 숨어 있다.
그들의 노동은 제대로 보상받고 있는가. 근대 이후 많은 사상가들이 노동의 신성성을 주장했지만 노동이 신성하게 취급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강도가 높은 노동은 안 보이는 곳으로 숨겨지고 노동자의 계급은 분화되며, 노동에 대한 가치는 점점 절하되어 간다. 마르크스는 “노동은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창조의 자극을 받는 역동적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와 역동성은 점점 흐려질 뿐이다. 자동화는 노동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안 보이는 곳으로 숨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노동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서는 노동에 따르는 충분한 휴식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