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양자역학과 마음의 혁명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닫기

보기 설정

닫기

글자 크기

컬러 모드

컬러 모드

닫기

본문 요약

닫기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닫기

양자역학과 마음의 혁명

시공간 지평의 확장 보여주는 ‘줌’
이 마법의 바탕에 있는 양자역학
동양고전의 오래된 지혜와도 연결
마음의 배치·방향을 바꿔야 할 때

직업이 고전평론가다 보니 하는 일이 주로 강의와 세미나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줌이 일상화하면서 시공간의 지평이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 영국 등과도 연결되었다. 시간의 폭도 넓어져서 이른 새벽, 늦은 저녁에도 부담 없이 세미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긴 스마트폰이 등장할 때 이미 예견된 세상이기도 하다. 손바닥 안에 세계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고, 세상 모든 곳과 동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히 원더풀 월드다!

이런 마법의 원천은 양자역학이다. 1905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특수 상대성 원리’가 발견되었고, 그와 동시에 양자역학의 세계가 열렸다. 하여, 과학계에선 1905년을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17세기 이래 서구문명을 지배해온 뉴턴역학의 패러다임이 전복된 것이다. 하지만 이 경이로운 원리들이 일상을 온통 장악하게 된 것은 SNS, 그리고 줌을 통해서다. 코로나가 ‘결정타’였다. 대체 양자역학이 뭐길래?

줌 강의가 일상화하면서부터 양자역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유튜브에는 이미 다양한 강의와 해설, 예능까지 넘쳐나고 있었다. 물론 이런 대중성이 무색할 만큼 양자역학은 지독하게 난해하다. 오죽하면 ‘누군가 양자역학을 이해했다면 그건 양자역학을 모른다는 뜻’이라는 조크까지 나왔을까. 그럼에도 거기에는 묘한 긴장과 끌림이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행렬역학’ ‘양자도약’ 등의 용어들이 마치 현대판 ‘고사성어’처럼 회자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과연 그랬다. 양자역학의 방정식들은 나같은 문외한의 접근을 원초적으로 차단한다. 한데, 그 해설을 근근이 따라가다 보면 아주 오묘한 원리들과 마주친다. 가장 유명한 ‘이중슬릿실험’에 따르면,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분리되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전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는 오직 관찰의 순간에만 결정된다. 그럼 관찰 이전에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모른다. 오직 확률로만 존재한다! 와우~ 말하자면 이 우주엔 ‘불변의 고유한 실체’가 따로 없다는 것. 주체도 객체도 없는, 그야말로 ‘무아(無我)’ ‘무상(無常)’의 세계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조금 더 따라가 보면 마침내 ‘시간도, 공간도 다 사라지는’ 실로 희한한 세계가 펼쳐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견고한’ 세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양자들의 무상한 요동 속에서 탄생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일 뿐이다. 주체에서 상호작용으로! 물질에서 사건으로!

이처럼 양자역학은 우리 인식의 문법을 완전히 전복한다. 물론 동양고전에서는 아주 익숙한 메시지들이다. 이 ‘오래된 지혜’를 양자역학은 방정식과 숫자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현대물리학과 동양고전의 눈부신 마주침! 게다가 그 지혜는 신의 계시나 명상가의 황홀경 체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마트폰과 줌, 오픈 AI 등을 통하여 신체와 일상에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과연 놀라운 세상이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이치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고 있을까? 양자역학은 주체와 대상을 나눌 수 없다고 하는데, 현대인들은 오직 ‘나뿐인 세상’을 고수한다. 주체와 대상을 날카롭게 구획하는 ‘낡은 이원론’에 빠져 있는 것이다. 지동설 이후에도 천동설을 신봉하고, 진화론 이후에도 창조론을 놓지 못하는 형국과 닮아 있다.

그 결과 도처에서 대립과 갈등이 그치지 않는다. 이 시간에도 전쟁은 멈출 줄 모르고, 국내 정치의 수준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 중이다. 더 끔찍한 것은 일상에 드리운 전운이다. 투자와 게임은 물론이고 먹방도 요리도, 심지어 교실까지 다 전쟁이다. 가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 할 만하다.

하여, 또 궁금해졌다. 과학의 발전은 왜 늘 인간을 이렇게 ‘욕망의 늪’으로 인도하는 것일까? 그 찬란한 기술들은 인간을 ‘전쟁과 노동’에서 해방시켜주기는커녕 더 한층 그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것일까?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기술 그 자체는 결코 인간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마음의 배치와 방향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 마음은 양자보다 훨씬 더 현묘하다. 그 잠재력을 계발하여 질적 도약을 감행하는 것이다. 어떻게? 증식에서 순환으로! 대결에서 교감으로!

그게 가능하겠냐고? 모르겠다. 확실한 건 ‘마음의 혁명’은 인류가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못한 유일한 비전이라는 사실이다. 양자역학이 인류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이기도 하고.

고미숙 고전평론가

고미숙 고전평론가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구독 취소하기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보기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닫기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