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환하면서 사람 곁에 살아온 나무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서울 문묘 은행나무

서울 문묘 은행나무

조선 초에 세운 최고의 유학 기관인 서울 문묘 명륜당 마당에는 특별한 은행나무가 있다. 나무높이 26m, 가슴높이 줄기둘레 12m의 이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무너앉은 문묘 일원을 복원한 1602년에 새로 심은 나무로, 명실상부한 문묘 일원의 랜드마크다.

생김새도 근사하지만, 나무에 담긴 전설은 더 특별하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나무는 ‘성을 전환한 은행나무’로 널리 알려졌다. 400년 전부터 이 나무는 오랫동안 씨앗을 풍성하게 맺는 암나무였다. 먹을거리가 넉넉지 않던 그 시절에 큰 나무에서 풍성하게 맺는 은행은 더없이 훌륭한 먹을거리였다.

자연히 가을이면 마을 사람들이 나무 곁에 모여들었다. 학문 탐구에 열중해야 할 명륜당의 앞마당에서는 야단법석이 벌어졌고, 유생들은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먹을거리를 찾아 모여든 백성들을 강제로 내쫓을 수 없었던 유생들은 나무가 씨앗을 맺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품었다.

유생들의 생각이 모이자 마침내 한뜻으로 제사를 올렸다. “나무가 더 이상 씨앗을 맺지 않게 해달라”는 소원을 담은 제사였다. 씨앗을 맺지 않으려면 이 은행나무가 암나무에서 수나무로 성을 전환해야 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생들의 간절한 소원이 나무에 온전히 닿았다. 이듬해 가을부터 나무는 유생들의 소원대로 씨앗을 맺지 않는 수나무로의 성전환에 성공했다.

물론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야기 속에는 옛사람들의 자연주의 철학이 담겨 있다. 베어내도 될 법한 성가신 나무를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려서 더불어 살고자 한 것이다.

1년 365일 내내 은행나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다가도 고작해야 보름 정도 풍겨오는 은행의 고약한 냄새를 견디기 어려워 암나무를 뽑아내는 일을 서슴없이 감행하는 이즈음의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전해주는 지혜로운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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