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나의 대통령 퇴진 구호는 ‘김영삼’에서 시작됐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정리해고 반대 투쟁 폭력 진압, 이라크전쟁 파병과 비정규악법 통과,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와 백남기 농민 사망… 이유도 방향도 분명했다. 대통령을 바꾸자는 구호이기보다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였으므로 그것은 급진적 민주주의의 요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익숙했던 퇴진 구호에 이물감이 들기 시작했다.

대통령 퇴진이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요구는 아니다. ‘문재인 퇴진’에 앞장선 이들이 최저임금 인상이나 난민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것처럼, 방향은 제각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탄핵소추를 당했으나 그것을 민주주의의 역사로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박근혜 퇴진 촛불의 경험은 대통령 파면을 민주주의의 증거로 기억하게 한다. 그러나 국민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서야 하는 상황은 민주주의가 실패한 증거이기도 하다.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정치 시스템의 붕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수십 년 작동하던 정치 시스템이 무너지는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확인된다. 시스템을 통해 선출된 권력이 안에서부터 시스템을 망가뜨린다. 선거제도나 결과를 존중하는 선이 관례로 유지되었다면 선거제도를 악용하거나 결과에 시비 거는 것이 정치가 된다. 상대 정당이나 정치인을 정치 무대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목표가 되고, 사법과 언론의 동원과 통제가 민주주의로 둔갑한다. 기득권을 가진 정치세력이 노동자나 여성, 소수자를 제대로 대표한 적 있었겠냐마는, 최소한 말로는 내가 당신의 편임을 설득하는 것이 정치였다. 이제 정치인들은 당신이 나의 적임을 고지한다.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상이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과 이재명에게 판돈을 모두 걸어버린 탓에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당 내부에서 이견을 제거하며 정치가 시작되니 민주주의가 숨 쉴 수 없다. 대통령은 거부권을 남발하고 국회는 강행처리를 반복하면서 정치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 사법과 언론도 정치 때문에 너덜너덜해지고 있다. 대통령 퇴진 요구는 민주주의의 전선이 아니라 진영의 구분선이 되어가고 있다.

여야가 상대를 비난하는 수사에 경제와 안보는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갖고 있는 구상이 별반 다르지 않다.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 정치가 실종됐다고들 한다. 그러나 대화가 단절되는 자리만큼 타협이 빠른 자리가 있다. 우리 삶과 세계가 어디로 향해야 할지 토의하는 자리가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정치 실종이다. 우리에게 닥친 위기, 물가와 부채와 과로와 차별과 죽음에 응답하며 변화를 만드는 일이 정치에서 사라지고 있다.

‘박근혜 퇴진’의 의미는 ‘임기 단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는 촛불을 들며 다른 세상을 꿈꿨고 나의 일터와 우리 동네에서 민주주의를 키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안녕들 하십니까” 묻고 “네 잘못이 아니야” 말해주는 관계들로부터, 노동의 존엄과 권리가 실현되는 세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지 않는 세상, 세월호 참사와 같은 아픔을 다시 겪지 않을 세상의 꿈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응답하지 않는 정치 대신 우리 스스로 움직였기에 민주주의의 증거가 됐다. 퇴진을 요구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민주주의의 장소들이 이미 만들어져왔기에 가능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받는 지지율 성적표에는 윤 정부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정치에 대한 냉소와 혐오가 섞여 있다. 삶이 달라질 리 없다는, 세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체념. ‘윤석열 퇴진’으로 모이는 일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디딤돌이 아니라 걸려 넘어질 돌부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집권 세력을 비판하는 만큼 정치를 회생시켜야 할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장소에서 더 모이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대통령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Today`s HOT
캐나다 콘월에서 이루어지는 군사 훈련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 자포리자의 참담한 붕괴 현장 이색 파인애플 피자와 굿즈를 선보인 영국 루파 피자가게 베네수엘라의 1958년 독재 종식 사건 기념 집회
프랑스 에너지 강화 원동력, 태양광 패널과 풍력 터빈 자이언트 판다를 위해 수확되는 대나무들
카스타익에서 일어난 화재, 소방관들이 출동하다. 터키의 호텔 화재 희생자 장례식..
안티오크 학교 총격 사건으로 미국은 추모의 분위기.. 주간 청중에서 산불 겪은 미국을 위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동남아 최초, 태국 동성 결혼 시행 브라질의 더운 날씨, 더위를 식히려는 모습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