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임기 후반 국정 목표로 ‘양극화 해소’를 제시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가 직접 개입을 해서라도 임기 후반기에는 소득·교육 불균형 등 양극화를 타개하기 위해 전향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실은 서민·청년·중소기업을 지원할 정책 리스트를 만들고 있고, 국회 예산안 심사에서 여야의 양극화 관련 사업을 수용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느닷없는 태세전환이다. 2년 반 동안 국정운영을 하면서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국민살림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몰랐단 말인가. 분노가 치밀 정도로 어이가 없다.
대통령이 양극화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취임사에서 “우리나라는 지나친 양극화와 사회 갈등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할 뿐 아니라 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무난했으나 해법은 ‘안드로메다’였다. “빠른 성장 과정에서 많은 국민이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고, 사회 이동성을 제고함으로써 양극화와 갈등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다.” 파이를 키우면 양극화가 저절로 해소된다는 단순 무지한 경제관이 ‘격노’ 잘하는 성정 탓에 교정될 기회도 없이 국정에 반영된 것이다.
대통령실은 “민간 주도 시장경제로 경제 체제를 전환시켜 경제를 정상화”했다며 임기 전반을 자찬했지만, 부자감세와 정부 역할 축소로 ‘대(大)격차 시대’를 연 것이 본질이다. 내년 예산을 보면 말로는 서민과 민생, ‘약자 복지’를 앞세우지만 재정 지출은 거꾸로 가고 있음이 쉽게 확인된다. 대통령이 불법 채권추심 근절을 강조했지만 내년 서민 정책금융 예산은 올해보다 6100억원 줄었다. 내년 공공임대주택 예산은 15.4% 삭감됐고, 다가구 매입 임대사업은 88.8% 줄었다. 청년채움공제, 내일배움카드, 국민취업지원제도 예산이 줄줄이 깎였고, 생계곤란 같은 위기상황에 대응하는 긴급복지 예산도 내년에 2.3% 줄었다. 가뜩이나 교부금 삭감으로 쪼들리는 자치단체들이 발행하는 지방채를 중앙정부가 사들이는 예산도 대거 줄였다. 그래놓고 정부 쌈짓돈인 예비비는 역대급(14%)으로 불렸다.
‘최후의 의료안전망’으로 불리는 의료급여의 본인 부담을 정액제에서 정률제로 바꿔 내년부터 급여 수급자들의 부담이 확 늘어난다. 고령과 만성장애로 병원·약국 이용률이 높은 수급자들은 ‘아프거나 굶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지난해 전세사기 대란 때 피해자 선구제를 위해 주택도시기금을 활용하자는 제안에 ‘서민들이 내집 마련을 위해 저축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다’며 반대하던 정부가 세수 결손을 메우는 데 주택도시기금을 끌어다 쓰기로 했다. ‘서민 주거안정은 노(No), 부자감세 뒤처리는 예스!’다.
정부는 올해 세법개정을 통해 상속·증여세, 소득세, 법인세를 대폭 깎아 고소득층 세부담을 5년간 20조원 줄이기로 했다. 일용직 근로소득에도 6%의 세율이 부과되는데, 비트코인 같은 가상자산에 대한 과세는 2년 유예하겠다고 한다. 세제개편안이 이대로 확정된다면 자산불평등이 심화돼 양극화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격차 벌리기에 매진하던 윤 대통령이 ‘양극화 해소’ 카드를 불쑥 꺼냈으니 의도를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친서민 중도실용’으로 정치적 곤경을 빠져나온 이명박 정부를 본떠 ‘양극화 해소 쇼(show)’라도 벌이려는 요량일 것이다. 의도도 불순하지만 ‘능력’이 될지는 더욱 의문이다. 내년 예산에서 정부 재량지출은 물가상승률을 밑도는 0.8% 증가에 불과하다. 양극화 해소를 하려고 해도 초긴축 예산으로 뭘 할 수 있겠는가. 시늉에 그칠게 뻔하다.
윤 대통령은 너무나 많은 거짓말로 국민 신뢰를 잃었다. 다론 아제모을루가 쓴 <권력과 진보>에 따르면 그는 국민에게 어젠다를 제시하고 이끌어갈 ‘설득권력’을 이미 상실했다. 양극화 해소 의지가 진심이라면 감세 정책을 철회하는 게 먼저다. 더 이상 국민을 기만하지 말아야 한다.
윤 대통령은 ‘도자기 박물관에 침입한 코끼리’처럼 몸을 쓸 때마다 한국 사회를 망가뜨렸다. 지난해 ‘국보급 도자기’인 R&D를 산산조각 냈고, 올해엔 의대 2000명 증원으로 의료시스템을 짓밟았다. 전 정부의 트럼프 인맥들을 죄다 수사하는 걸 보면 ‘트럼프 폭풍’에 제대로 대응할지도 걱정이다. 코끼리가 무슨 재주를 피워 양극화를 해소할 건지 지켜보고만 있기엔 한국 경제가 너무도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