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지난 15일 이사회를 열고 주가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10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3조원 규모의 자사주는 3개월 내 사들여 전량 소각하고, 나머지 7조원어치는 활용 방안과 소각 여부 등을 추후 결정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자사주 매입은 회사 자금으로 시중의 주식을 사들이는 것으로, 유통되는 주식 수를 줄여 주가를 올리는 효과가 있다. 이 때문에 배당과 더불어 대표적인 주주환원 정책으로 꼽힌다.
삼성전자가 약 7년 만에 자사주 매입 카드를 꺼낸 데는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9를 밑돌고 있기 때문이다. PBR이 1 아래라는 건 회사의 보유 자산보다 시가총액이 낮다는 의미로, 주주환원의 필요성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뜻한다.
최근 한국 증시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기조와 맞물려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요구하는 주주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국 ESG기준원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4년 6월까지 자사주 매입과 소각 관련 주주제안은 총 42건이다. 2020∼2022년에는 매년 5건 미만에 그쳤던 주주제안이 2023년 14건, 2024년 20건으로 급격히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2023년 주요 기업들의 정기주총을 시작으로 자사주 소각 결정 권한을 주주에게도 부여하는 정관변경 안건이 다수 상정된 점도 눈에 띈다. 단순한 제안을 넘어 주주가 직접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결정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셈이다.
다만 최근 5년간 상정된 자사주 관련 주주제안 중 가결된 안건은 3건에 그칠 정도로 문턱은 높다. 국내 대다수 상장기업의 소유 구조상 지배주주 지분율이 높아 주주제안 가결이 쉽지 않은 탓이다.
자사주 매입에만 그치는 사례도 있다. 이들 회사는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상호주·우호지분 형성 등 지배력 방어 수단으로만 활용한다. 경제개혁연구소 분석 결과, 2011∼2022년에 자사주 처분을 통해 우호 주주를 확보한 거래 건수는 총 52건이다. 주로 두 회사가 동시에 자사주를 상대방에게 매각해 우호지분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A사가 B사에 자사주를 매각하고, 3자 배정 유상증자 등을 통해 A사가 B사의 주식을 보유하는 사례도 있었다.
경영진의 지분이 낮은 회사에서 이같은 사례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총 7차례 자사주 거래 등을 통해 우호지분을 확보했던 네이버가 대표적이다. 네이버는 2017년 미래에셋과 5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교환했다. 2020년에는 CJ대한통운, CJ ENM 등 CJ그룹과도 6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교환과 3자 배정 유상증자에 참여했다. 네이버는 이를 통해 우호 지분을 3.56% 확보했다. 네이버 최대주주는 국민연금(8.24%)으로, 네이버 총수인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의 지분은 3.77%에 그친다.
지배력 분쟁이 있는 회사에서 자사주는 총수일가의 든든한 우군이 됐다. 고려아연은 2022년 LG화학·한화와 자사주 맞교환을 통해 3.17%의 우호지분을 확보했다. 이들 회사는 최근 영풍·MBK파트너스와의 경영권 분쟁에서 고려아연의 백기사가 됐다.
‘자사주 마법’도 있다. 인적분할을 하면 기존 주주는 분할 비율만큼 신설 기업의 주식도 새롭게 받을 수 있다. 기존 회사의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인적분할을 통해 신설된 회사의 신주는 의결권이 생긴다. OCI는 지난해 인적분할을 통해 신설회사 의결권을 확보했다. 대주주 의결권이 확대된 만큼 소수 주주의 의결권은 낮아져 OCI 주가는 내리막을 걸었다.
이 때문에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최근 논평을 통해 삼성전자가 올해 안으로 10조원을 모두 매입해 소각할 것을 권고했다. 소각 여부를 밝히지 않은 7조원에 대해 겨냥한 발언이다. 포럼은 “소각없는 자사주 매입은 이사회 안건으로 상정되기도 어렵다”며 “자사주는 ‘회사 돈’이 들어갔는데 특정 주주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쓴다면 불법”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들어 금융당국도 상장사 자사주에 대한 신주배정 금지 등 제도 개선에 나서고 있다. 자사주 보유 비중이 발행주식총수의 5% 이상인 경우 보유현황과 목적, 향후 처리계획 등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이사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그러나 개정안이 시행되더라도 자사주를 통한 우호지분 확보까지 막을 수는 없다. 박동빈 ESG 기준원 선임연구원은 “자사주를 보유한 기업은 보유 목적과 구체적인 처분 계획에 대해 투자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투명하게 공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