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막이 점퍼에 나일론 바지를 등산복이라 부르는 대신 ‘고프 코어’라 말하면 잘파세대(Z세대+알파세대)의 미감을 이해하는 사람이 된다. 축구 유니폼과 청바지를 함께 입는 조합을 ‘블록 코어’라 부르면 거리에서 마주친 대학생들의 낯선 착장들이 이제야 좀 이해된다. 야외 활동을 위한 아웃도어 의류를 일상에서 멋스럽게 입는 것을 고프 코어, 유니폼을 일상복과 어울리게 입는 것을 블록 코어라고 한다. 명명은 유행을 더 빠르게 확산시킨다. 단, 유행하는 이름엔 조건이 있다. 사람들의 귀에 그 이름이 꽂혀야 하며, 그리 어렵지 않게 많은 사람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대와 연결되어야 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패션 스타일도, 예술 사조도, 철학의 계보도 자신만의 이름을 찾고 알리면서 역사 속 목차를 만들었다. 다다이즘, 미니멀리즘, 브루탈리즘과 같은 수많은 ‘이즘(ism)’들을 생각해 보자. 역사 속 ‘이즘’들은 강력한 철학적 토대를 바탕으로 시대에 신선한 화두를 던졌고, 사람들을 설득했고, 동참시켰고, 행동하게 하며 세상을 바꿔왔다.
고프 코어, 발레 코어, Y2K 코어, 블록 코어처럼 명사 뒤에 ‘코어’를 붙이는 ‘패션 용어’들이 많아지고 있다. 누군가는 마케팅이라고 SNS용 ‘트렌드를 위한 트렌드’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코어’를 마케팅화하는 것과는 별개로 ‘코어’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가졌던 잠재력은 주목해야 한다. ‘코어’라는 단어를 붙여 전에 없던 의미를 만드는 방식은 ‘놈코어(normcore)’에서 시작되었다. normal과 hardcore의 합성어인 ‘놈코어’는 소박하고 평범해 보이는 패션 트렌드를 지칭하는 용어에서 ‘특별할 것 없음에서 해방감을 찾는 태도’로 그 뜻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니까 ‘코어’는 시작부터 패션이나 스타일 용어에 머무르지 않고 태도와 철학의 언어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코어’는 세상에 알려진 스타일을 따르거나, 누군가가 ‘아름답다고 말한’ 것들을 답습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대신 의미 있는 현상들을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재해석하기를 권한다. 동시대에 걸맞은 가치로 전에 없던 맥락을 만들고 그 맥락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공명하는 것. 그건 자신만의 세계를 정의하는 연습이자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믿는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움직임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코어를 따르는 힘이 아니라 코어를 만드는 힘이다. 옷과 신발을 사도록 부추기는 ‘코어’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나의 문법으로 가치를 만들어낼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만의 고유한 ‘코어’를 만드는 훈련으로 우리는 소비적 코어로부터 해방돼,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태도로서의 코어를 습득할 수 있다.
연습과 시도는 빠를수록 이득이니 지금부터 시작해 보자. 이 시점에 나를 매료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만의 심미적 테마와 변주 가능한 코드가 있다면 코어의 앞에 오는 것이 무엇이어도 좋다. 어떤 순간에도 서두르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도심형 여유의 상징 ‘비둘기 코어’, 생존 전략이 귀여움과 최소한의 에너지 소비인 라이프스타일을 표방하는 ‘푸바오 코어’. 당장은 더 적절한 코어가 떠오르지 않는 관계로 이번 주말은 푸바오 코어를 견지하며 검은 바지에 흰 티를 입은 채로, 적게 움직이고 많이 사랑받으며 살아야겠다.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