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수용” “감독 소홀” 재판부 판단에도 ‘책임 회피’ 일관
정부, 2심 판결 수용 여부 안 밝혀…피해자 자살 시도까지
피해단체 “명예 회복 없이 거듭된 항소, 돈 강탈하는 느낌”
‘놀다가 던진 슬리퍼에 지나가던 경찰이 맞았다’거나 ‘기차역에서 외할머니가 표를 예매하는 사이 혼자 있었다’는 등 이유로 수용시설에 강제로 끌려가 폭력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1975~1987년 부산 북구 ‘형제복지원’으로 잡혀갔던 사람들이다.
40~50년이 흐른 지금 법원은 피해자들이 “거처가 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납치됐다”(서울중앙지법 제15민사부)고 판단했다. 그들이 성착취·강제노역·구타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한 사실도 인정됐다.
국가는 배상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시효가 지났다’거나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 집행을 특정해야 한다’며 배상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들의 속은 타들어간다. 지난 17일에는 국가 손해배상 청구소송 2심에서 승소한 피해자 김의수씨(52)가 ‘국가가 상고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국가는 상고 기한이 5일 남은 24일까지도 2심 재판 결과 수용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국가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는 식으로 배상 책임 회피를 위한 소송전을 거듭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경향신문은 서울중앙지법, 부산지법의 8개 재판부가 형제복지원 피해자 111명이 3~19명씩 나누어 낸 국가 손해배상 사건에 대해 지난 1~10월 내린 1심 판결문 10건을 입수해 분석했다. 법원은 일관되게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모든 재판부는 일관되게 형제복지원 강제수용의 근거였던 훈령이 위법이자 위헌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중앙지법 제15민사부는 국가가 감독을 소홀히 하거나 묵인해 피해자들의 “생명·신체 등에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 상태가 발생했다”고 봤다.
서울중앙지법 제27민사부는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갖고,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며 “빈곤·질병으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부랑인으로 구분해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사회에서 격리하고, 형제복지원을 사회복지기관으로 인가해 ‘보호’라는 이름 아래 단속한 부랑인의 수용을 위탁하고는, 형제복지원 등이 폭력적 방법으로 부랑인을 감금해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도록 묵인·비호하였다”고 지적했다.
어린 나이에 수용된 피해자들은 강제노역, 폭행에 시달렸다. 성폭력도 비일비재했다. 감금된 동안 유년·청소년 피해자들의 교육받을 권리도 침해됐다. 서울중앙지법 제14민사부는 “미성년자로서 학령기에 있던 원고들 대부분이 강제노역, 폭행 등에 시달리며 장기간 수용되어 있다가 퇴소한 경우 정상적인 정서적 발달과정을 겪지 못했다”며 “이 사회에서 소외된 채 살아오게 된 큰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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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배상액을 정할 때 피해자들이 오랜 시간 고통받은 점도 고려했다. 부산지법 제11민사부는 “불법행위가 있었던 때로부터 약 35년 이상 이르는 오랜 기간 배상이 지연됐다”고 짚었다. 서울중앙지법 제15민사부도 “피해자들이 장기간 고통받게 된 사정도 참작돼야 한다”고 봤다.
국가가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이 승소한 2심 결과에 반발해 대법원에 상고한다면 피해 회복은 그만큼 더 미뤄지게 된다. 이향직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대표는 “피해자들이 소송을 시작한 궁극적 목표는 대한민국 법원으로부터 국가폭력을 인정받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며 “그런데 국가의 거듭된 항소는 되레 피해자들로 하여금 ‘돈을 강탈한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