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진다. 생과 직을 걸고 선언에 이름을 올리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일까. 비장한 결기에 비해 숭고해 보이지 않는다. 어떤 마음으로 모였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무너지고 찢어지는 우리 사회를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줄줄이 선언하는 모습은 다소 어색하다. 달라진 시대에 걸맞은 지식인 역할을 재론할 사정은 내게 없다. 다만 ‘어른 없는 사회’란 지적처럼 주변에 지성의 준거로서의 지식인보다 정파적 이해의 대변자가 더 많아진 건 불행한 사실이다.
단기 처방으론 엄두도 낼 수 없이 켜켜이 쌓여 우리 삶을 짓누르고, 오로지 견디라 할 뿐인 지금의 체제를 마주 본다면 시국선언은 대통령을 향해 있을 수만은 없다. 과녁은 무한 책임을 져야 할 대통령을 넘어 수십년째 번갈아 집권하며 이 질서를 만들어온 체제의 공모자들이어야 한다. 시국선언이 어색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교수·지식인이란 지위만큼 이들도 이 가혹한 체제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위선을 따지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조차 그들이 타개하고자 하는 그 시국의 일부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는 데서, 우리도 현 시국의 일부라는 비참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시국의 일부라는 비참은 스스로 개혁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대통령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지리멸렬한 교착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어떤 대안도 못 내놓는 현실, 무엇이든 해결할 것처럼 무대를 쌓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철수하기를 반복하는 광장의 무기력한 현실을 인정할 수 있는가. 또한, 민주당이 우리가 마주하는 비상한 시국의 핵심적 일부라는 사실, 그러므로 반윤석열로의 집결이 이 부당한 질서를 유지하는 주요 경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가.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가 바뀜으로써 대통령도, 이 지긋지긋한 질서도, 이 비상한 시국도 바꿀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대통령에게서 벗어나야 대통령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이 불행의 순환도 멈출 수 있다.
사회운동과 정당들은 대통령이라는 과녁을 만들어놓고 광장에서 시민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과녁에 무수히 많은 화살이 명중해도 우리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시민들은 안다. 대통령을 신임하지 않는 시민의 수와 광장의 규모 사이 불비례는 시민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준다. 시민들은 지금 거대한 두 정치세력 간 벌어지는 내전 자체를 기각하는 것이다. 수십년째 서로를 여러 이름으로 바꿔 불러가며 청산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그들만의 시간을 기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그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적대의 일부로서 역할을 해온 사회운동도 거부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시민들은 정파적 이해와 공동체의 이해를 구분 짓는다. 기다리는 시민들의 존재는 사회운동의 큰 기회이기도 하다. 광장은 억지로 열고자 하면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