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끝났는데 질 수 없다는 제스처만 남았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가 적은 맥락과 무관하게 이 문장을 곱씹으며 윤석열 대통령을 떠올렸다.
지난 7일 기자회견 후 윤 대통령은 몇 개의 조치를 취했다. 쇄신의 시작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 고개를 끄덕여줄 수 없다. 그보다는 무언가를 하긴 한다고 내보이는 ‘제스처’에 가깝다고 본다. 대통령실은 공천개입 의혹을 ‘매정’하지 못해 받은 연락 문제로 치환하더니 윤 대통령 부부가 오래 쓰던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고 알렸다. ‘김건희 라인’으로 지목된 강기훈 선임행정관은 음주운전 징계를 마치고 복귀한 뒤 “가장 자유대한민국을 걱정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은 대통령님”이라는 입장문을 남기고 떠났다. ‘국정운영에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라는 흔한 문구, 의례적 반성도 없었다. 꾸준히 설득한 결과로 거취를 정리했다는데, 꾸준한 설득까지 필요했던 저간의 사정이 뭘까 의아해진다. 이런 게 쇄신의 시작이라면 남은 조치에도 기대가 생기지 않는다.
제스처들에 담긴 의미는 뚜렷하다. 이는 문제의 핵심을 의도적으로 비켜가면서 쇄신 범위를 좁히고 방향성을 뒤틀려는 시도로 보인다. 민심 요구가 높은 김건희 특검법은 세 번째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가 임박했다. 윤 대통령 부부에 대한 각종 의혹의 진상을 밝힐 다른 방법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일련의 움직임에는 핵심을 직시하려는 용기도, 뼈를 깎고 몸을 부수는 과정의 고뇌도 묻어나지 않는다.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윤 대통령의 그간의 선택들은 민심의 큰 줄기에 반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왔다. 보르헤스 소설처럼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있는 정원’이 있다면 그 길에서 윤 대통령과 다른 방향을 택하는 무리가 매번 늘어난 시간이다. 일부는 윤 대통령이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를 “박절하지 못해서”라고 할 때, 일부는 김건희 특검법에 거듭 거부권을 행사할 때, 일부는 공천개입 의혹 해법으로 ‘부부싸움’을 예고할 때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동행자가 줄어드는 것은 윤 대통령이 감당할 몫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이 대내외 여건이 불안정한 시기, 국정 리더십의 중대 위기 속에도 이뤄지고 있다는 건 모두에게 주어진 불행이다.
민심과 유리된 윤 대통령의 선택은 매번 주권자들의 정치적 무력감을 확산한다. 개개의 일상을 살면서도 모두가 공동체 안에서 호흡하고 사회의 방향을 함께 잡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일깨우는 일이 민주주의 국가 대통령의 책무가 아닌가. “시작도 국민, 방향도 국민, 목표도 국민”(2021년 8월17일)이라던 윤 대통령은 지금 진심으로 민심과 ‘공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리하여, 조금도 무례하지 않았던 ‘그’ 질문의 표현을 조금 빌려 묻고 싶다. “흔히들 쇄신할 때 꼭 갖춰야 할 요건이 몇 가지 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쇄신을 요구받게 된 핵심 사안을 직시하고 구체적인 해법을 내놓는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대통령이 쇄신 의지가 없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내놓아야 할 답은 명확하다. ‘제스처’로는 달성할 수 있는 쇄신도, 확보할 수 있는 국정동력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