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무대에 오릅니다’…함께 살아갈 세상을 위해[포토다큐]

이성수씨와 장근영씨가 지난달 24일 서울 서대문구 모두예술극장에서 진행된 ‘모두스테이지’의 마지막 공연 <성수와 근영이의 오픈/웃픈 마이크>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 이 공연은 중도시각장애인인 성수씨와 근영씨가 시각장애인으로 겪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성수씨(오른쪽)와 근영씨가 <성수와 근영이의 오픈/웃픈 마이크> 공연 전 마지막 리허설을 하고 있다.

성수씨와 근영씨가 본 공연 전 리허설에서 맹학교에서 안마를 배우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수씨는 연극배우를 시작하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맹학교에 입학해 안마를 배우고 안마사로 일했다. 근영씨는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직장’을 찾던 중 헬스키퍼(기업체에 고용돼 직원들에게 안마를 제공하는 안마사)‘가 되기 위해 안마를 배웠다.

‘모두예술극장’에서 ‘모두스테이지’ 공연이 열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예술 공연장 ‘모두예술극장’ 개관 1주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장애예술을 위한 탐색의 장으로 마련된 ‘모두스테이지’가 일주일 동안 열렸고, 마지막 공연인 <성수와 근영이의 오픈/웃픈 마이크>가 시작됐다. 무대에 오른 이성수씨(43)와 장근영씨(42)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줬다. 유쾌하면서도 담담하게.

“시각장애인이 되고 나서는 걷다가 자꾸 사고가 나는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움츠린 자세로 조심조심 걷게 되었죠.” “장애여성으로 산다는 건,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때로는 5가 되기도 하고, 10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리허설을 마친 성수씨와 근영씨가 무대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근영씨가 공연 전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다. 근영씨는 아버지의 다래끼 치료를 위해 갔던 병원에서 이름도 생소한 망막색소상피변성증 판정을 받았다.

이성수씨가 무대에 오르기 전 분장을 하고 있다. 그의 오른쪽 눈은 군대에서 녹내장이 발병하며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20대 후반에 왼쪽 눈에도 녹내장이 발병해 현재 그의 잔존시력은 0.1 이하다.

성수씨와 근영씨는 중도 시각장애인이다. 성수씨는 군대 시절에 녹내장으로, 근영씨는 어린 시절부터 이름도 낯선 ‘망막색소상피변성증’으로 시력을 잃어갔다. 20대 후반에 성수씨의 온전했던 왼쪽 눈에도 녹내장이 찾아왔다. 현재 그의 잔존 시력은 0.1 이하다. 시야의 범위는 10도가 넘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부딪히는 일이 잦았던 근영씨는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망막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당시만 해도 1.0이었던 근영씨의 시력은 급격하게 나빠져 지금은 아주 가까운 사물의 색과 형태 조차도 잘 구분할 수 없다.

김해문화의전당에서 진행된 ‘접근성 워크숍’에 참석한 장근영씨가 공연장 관계자들과 인근 역에서 공연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워크숍에 참가한 서종호 김해문화관광재단 공연기획팀장은 “당사자분들과 직접 같이 다니니 일상적으로 다녔던 공간도 다르게 보였다”며 “극장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즐거운 곳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근영씨가 김해문화의전당 입구에 놓인 촉지도를 확인하고 있다. 들어온 입구와 반대편에 놓인 촉지도를 확인한 근영씨는 “촉지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놓인 곳이 시각장애인들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모두스테이지’가 끝나고 2주가 지났다. 근영씨는 ‘접근성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경남 김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접근성 워크숍은 공연 시설을 돌아보며 장애인들의 문화적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행사다. 김해문화의전당 인근 경전철 역에 도착하자 근영씨는 흰 지팡이를 꺼냈다. “역에서 7분 정도”라는 김해문화의전당 관계자의 말과 달리 흰 지팡이를 든 근영씨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는 곱절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비상시 저시력자가 대피할 수 있는 방법, 건물 입구에서 공연장과 매표소 향하는 길, 화장실의 조도 등 근영씨는 시각장애인의 시선에서 접근성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근영씨에겐 물리적인 접근성만큼이나 사람들의 태도 변화도 중요하다.

“워크숍에 참석해 보면 시각장애인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도 있으세요. 그분들이 저를 만나면서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데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시잖아요. 거기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시각장애인 인식 개선을 위한 강의를 하며 책도 쓴 근영씨의 이름 앞에는 수식어들이 많다. 배우, 작가, 연출, 강사, 창작자…. 하지만 그는 이런 수식어가 영 어색하다. “거창하게 배우라기보단 ‘당사자 장근영’으로 시각장애인의 목소리를 낸다고 생각해야 무대에 오르는 용기가 생긴다”고 근영씨는 말한다.

이성수씨(가운데)가 배우 김원영(왼쪽)·김도완씨와 국립극장에서 <몬스터 콜스>의 한 장면을 연습하고 있다. <몬스터 콜스>에는 성수씨를 비롯해 3명의 장애인 배우와 4명의 비장애인 배우가 출연한다.

성수씨가 노트북에 이어폰을 꼽은 채 대본 리딩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중도 시각장애인으로서, 일상에서의 모순과 부조리한 상황에서 느꼈던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리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몬스터 콜스>의 민새롬 연출이 성수씨의 손을 잡고 움직임을 설명하고 있다. 성수씨에 대해 민 연출은 “성수님은 장면과 드라마 텍스트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문해력이 좋은 통찰력이 있는 배우”라고 말했다.

성수씨의 무대는 이제 국립극장이 될 참이다. 다음달 5일부터 4일간 열리는 <몬스터 콜스>에 비장애인과 함께 출연한다. 성수씨의 연습은 다른 출연진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는 종이 대본을 손에 들지 않고 노트북을 켜고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한 귀로는 다른 배우들의 대사를 듣고, 이어폰을 꽂은 귀로는 노트북에서 들려오는 대사를 따라가며 연습한다. 단체 군무와 무대 위 동선은 동료 배우들과 연출가의 손을 잡고 몸으로 익힌다.

성수씨가 국립극장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 환승게이트를 걷고 있다. 다음달 5일부터 상연하는 <몬스터 콜스>의 연습이 한창인 가운데, 경기 남양주시에 거주하는 그는 연습에 참석하기 위해 일주일에 6일 왕복 3시간을 지하철을 타고 국립극장으로 향했다.

성수씨가 맹학교 동기인 안마사 심수경씨의 안마원을 찾아 인사하고 있다. 성수씨의 12년 지기 수경씨는 성수씨를 보면 “‘기특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고 말했다.

잔존 시력이 남아 있는 성수씨는 장애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객으로부터 ‘저 사람이 무슨 장애인이냐’는 말을 들었다. “저는 전맹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운 사람도 아니잖아요.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랄까요.” 그는 스스로 자기를 ‘경계인’이라고 말한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창작의 동력으로 이어졌다. 저시력자로서, 안마사로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직접 쓴 연극 <국가공인 안마사>, <도깨비 안마원> 두 편을 작년과 올해 무대에 올렸다.

장근영씨가 지인인 이우주 작가의 전시에서 음성해설을 듣고 있다. 배우 활동을 하며 근영씨 주변엔 예술가들이 많아 졌다. 지인들의 공연·전시를 보러 가는 그는 작품을 감상하며 접근성에 관한 사항들을 유심히 살핀다.

근영씨가 이우주 작가의 작품을 손끝으로 느끼고 있다. 근영씨는 시각을 잃기 전보다 공연이나 전시를 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힘빼고 컴퍼니의 프로듀서 이루화씨와의 첫만남도 루화씨의 전시에서 이뤄졌다.

“시각장애인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을 만들고 활동하는 데 개인보단 단체로 움직이는 편이 수월하겠더라구요.” 올해 초 성수씨는 창작 단체 ‘힘빼고 컴퍼니’를 만들었다. 힘빼고에는 성수씨와 근영씨 말고도 배우이자 직물예술가인 이루화씨(37)도 함께 한다. 힘빼고에서 루화씨는 배우·예술가의 이름은 잠시 내려놓는다. 무대음향과 디렉팅부터 지원단체와의 소통, 정산·행정업무까지. 직함은 프로듀서지만 루화씨는 성수씨와 근영씨의 무대를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성수씨와 근영씨가 무대라는 공간에서 맘껏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그 무대를 보고 있으면 배우·창작자로서 저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에요.” 루화씨가 힘빼고에 합류한 이유를 말하자 근영씨가 옆에서 한마디 얹었다. “우리에겐 정말 ‘귀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