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플랫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지난해 한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누군가 입덕 계기를 물어보면 ‘열심히 해서’라고 합니다. “그렇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 정도면 입덕까지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덕질은 어떻게, 얼마나 해야 진짜배기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요? 두 반응의 사이에서 “아이돌 팬은 이럴 것”이라는 묘한 편견을 마주합니다. 그것은 해묵은 ‘OO녀’ 프레임, 아이돌 팬은 ‘빠순이’라는 편견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덕질에 쏟는 시간이나 기력을 생각하면 저는 ‘라이트 팬’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팬도 있어요!’ 혹은 ‘모든 팬이 다 빠순이인 건 아니거든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오히려 저보다 더 덕질에 진심인 팬들을 보며 “누군가의 취미에 대한 평가는 정중히 사양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 덕질은 제 덕질입니다. 덕질, 그건 제 맘이잖아요?

경향신문의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이 기록해 갈 ‘아이돌 덕질 이야기’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환불받으려면 ‘영상’을 찍으라고요?…우리의 팬심이 ‘볼모’가 될 때 [‘아이돌 덕질’ 제 맘이잖아요?③]

📌[‘아이돌 덕질’ 제 맘이잖아요?①] ‘빠순이’ 하나로 퉁쳐지는 ‘아이돌 팬’, 근데 저는 라이트 팬인데요

📌[‘아이돌 덕질’ 제 맘이잖아요?②]저기요 하이브씨, 짓밟은 건 ‘팬들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음악 CD를 구매하신 건 언제인가요? 대다수가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해 음악을 듣는 시대지만 전 두 달 전 ‘ㅂ그룹’의 앨범을 구매했습니다. 새로운 앨범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아이돌 그룹의 앨범에 관한 이야기는 언론에서도 여러 번 다뤘습니다. ‘포카(포토카드)’를 모으기 위해, 팬미팅을 가기 위해 적게는 몇 십장, 많게는 몇 백장의 앨범을 구매하는 팬들과 음반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앨범이 얼마나 많은가와 같은 이야기들이었죠. 어떤 면에선 팬들이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만드는지 초점을 맞춘 기사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문제도 심각하지만, 전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앨범을 구매하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입니다. 앨범이 불량일 때를 대비해 ‘개봉 영상’을 찍어둬야 한다는 사실요. 앨범 외에도 수많은 ‘굿즈(아이돌 관련 상품)’들이 이런 방식으로 유통되고 있었다는 건, 누군가의 팬이 되기 전에는 몰랐던 일입니다.

‘개봉 과정을 촬영해야 하는’ 상품이라니

‘물품 개봉 과정을 영상 촬영하실 것을 권장드립니다.’

온라인을 통해 구입한 굿즈의 택배박스에 붙어 있던 ‘주의사항’입니다. 살면서 수많은 택배를 받았지만 위와 같은 주의사항을 본 건 처음이었어요. 뜻을 이해하지 못해 ‘덕질선배’ 친구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대답은 꽤나 건조했어요.

“혹시 누락(앨범 구성품에 대한 누락) 있다고 할까봐. 누락이 없어도 있다고 하는 경우가 많아서.”

저는 황당한데,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더더욱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누락을 왜 내가 증명해야 하는 건데?’라는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묻지 않았습니다.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포카’의 가치가 높다는 걸 압니다.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하는 포토카드는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하지요(가격이 비싸서 ‘반포자이’라는 이름이 붙는 포토카드도 있습니다). 보통 포토카드는 앨범에 1~2장씩 포함되어 있는데요. 간혹 누락되지 않았는데도 누락되었다고 말하는 일부 팬, 블랙 컨슈머가 있을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일부 블랙 컨슈머를 거르기 위해 모든 팬들이 개봉 영상을 촬영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게 이상하긴 했죠. 그래도 그땐 ‘뭐 이렇게 바라는게 많아…’ 생각하곤 혀를 차며 넘어갔습니다. 물론 영상을 찍지도 않았어요.

국정감사장에 등장한 ‘불량품’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저를 ‘ㅂ그룹’에 입덕시킨 한 친구의 ‘카톡’이었습니다. 친구는 ‘웃안웃(웃긴데 안웃겨)’이라며 단톡방에 지난 10월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의 클립영상을 공유해줬어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위버스에서 판매한 팔쪽 부분이 이염된 굿즈,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 생중계 . NATA 국회방송 유튜브 갈무리

위버스에서 판매한 팔쪽 부분이 이염된 굿즈,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 생중계 . NATA 국회방송 유튜브 갈무리

“언박싱이라고 하죠, 이걸 이렇게 해야만(영상을 찍어야) 반품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강유정 의원은 설명하면서 자료 영상을 틀었습니다. 굿즈로 판매된 셔츠를 개봉하는 영상이었는데요. 영상 속 셔츠의 팔쪽에는 이염이 있었습니다. 강 의원은 이어 이렇게 발언했어요. “평범한 소비자가 저처럼 촬영을 해서 발견하지 못하면 반품이 안 되는 겁니다. 위버스에서는, 이게 말이 되나요?” 이런 말도 합니다. “요즘에 반품해보시면 알겠지만 단순 변심도 가능해요.”

저도 그 생각부터 떠올랐어요. ‘하자는 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영상을 남기라니… 요즘 세상에 이게 말이 돼?’라고요. 그런데 영상을 함께 본 친구들은 제 생각과는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를 했어요.

“예전부터 하자와 누락 많았지.”

“뽁뽁이 없이 박스에 물건만 덩그러니 와서 앨범이 망가져서 온 적도 있었잖아. 이게 말이 되냐고.”

“나도 배송시켰었는데 뽁뽁이 없는거 보고 황당. 보내기만 하면 다냐.”

대화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팬들이 언박싱 영상을 찍게 된 이유는 판매자가 ‘물품 개봉 과정을 촬영하도록 권유’해서가 아니라 소비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겁니다. 하자와 누락, 배송 중 파손으로 인한 불량이 많았지만 회사는 환불과 교환을 안 해줬고 소비자는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려다 보니 개봉 영상을 찍는 절차가 관습처럼 굳어졌다는 거예요. 아니 대체 얼마나 환불을 안 해줬기에 영상까지 찍게 된 걸까요?

① 누락, 하자 또는 배송 중 파손이 많은 제품의 ② 불량에 대해 ‘소비자 잘못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③ 영상을 찍는다.

쓰고 나니 더더욱 황당하게 느껴지네요.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① 누락, 하자 또는 배송 중 파손은 모두 기업의 잘못입니다. 평범한 기업이라면 불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죄송하다고 사과도 하겠지요. ② 그래서 더 이해되지 않습니다. ‘소비자가 잘못이 없다’는 걸 왜 스스로 증명해야 하죠? 수많은 택배를 받아봤지만 ‘네가 잘못이 없다는 걸 우리에게 증명해’라고 요구하는 업계는 처음입니다. ③ 영상을 찍는 방법도 그렇습니다. 손쉬워 보이는 방법이지만, 결국 소비자가 수고해서 기업의 일을 덜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사 블랙 컨슈머가 많다고 해도 그걸 거르는 일은 기업의 일입니다. 그 정도로 소비자를 못 믿겠으면 ‘시리얼 넘버’를 만들어 관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소비자에게 ‘잘못 없음’을 증명하라는 건, 사실은 대다수의 소비자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건가?’

이 의심의 눈초리는 ‘생각없이 사주니까 그런 거 아니냐’ ‘불매한다더니 너희들이 무슨 불매를 하냐’는 외부의 눈초리와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빠순이’를 향한 멸시입니다.

도대체 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저는 ‘앨범을 사주고, 굿즈도 사주는’ 팬덤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팬심’이
팬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볼모’가 될 때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 생중계 . NATA 국회방송 유튜브 갈무리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 생중계 . NATA 국회방송 유튜브 갈무리

공정거래위원회는 올해 8월 하이브, YG, SM, JYP의 4대 엔터사의 아이돌 굿즈 판매사업자인 위버스컴퍼니, 와이지플러스, 에스엠브랜드마케팅, 제이와이피쓰리씩스티에 시정명령 경고 및 과태료를 부과했습니다.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전자상거래법)’을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법이 정한 청약 철회기간보다 짧은 임의의 기간을 설정하고, 상품 개봉 과정을 촬영한 영상이 없으면 환불을 거부하는 등 청약 철회를 제한했다는 이유였어요. 하이브는 300만원의 과태료 처분을, 나머지 세 회사는 250만원의 과태료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과태료를 아이돌 굿즈 수익과 비교해 볼까요? 2021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하이브의 굿즈 매출액은 1조2079억원이었습니다. 300만원의 과태료는 매출액의 0.000025%에 불과합니다. 국감장에서 강 의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돌 기획사들의 어린 팬심을 볼모로 한 배짱 영업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해외 팬들 또한 불공정 갑질의 피해자다.”

다른 소비와 아이돌 팬덤의 소비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아이돌 팬덤이라는 소비자들은 불공정 갑질의 피해자가 되는 걸까요? 소비자인 팬덤의 대다수가 젊은 여성이고, 소비의 이유가 ‘누군가를 응원하기 위해서’여서일까요. 아이돌을 응원하는 마음이 ‘함부로 해도 된다’는 메시지가 되고 기업에게는 ‘볼모’처럼 여겨지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아무도 CD로 음악을 듣지 않는 시대에 팬들은 앨범을 사주(!)면서도 대우는커녕 소비자로서의 정당한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팬심(팬들의 마음)’을 담보로 소비자에게 과한 책임을 지우는 이 업계의 관행과 고작 3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정부의 조치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K팝’업계가 지속 가능한 경영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젊은 여자들이 아이돌에 빠져서 ‘쓰레기’를 만든다고 비난하기 전에 말입니다.

▼ 이아름 기자 areumlee@khan.kr


Q: 여러분도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으신가요? 저처럼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답답한 점 있으셨나요. 무엇을 보고 입덕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요. 무조건적인 박수갈채 ‘주접’도 환영합니다.

구글 폼 링크 https://forms.gle/pw1RwdoDWo29RzSt7

TOP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