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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을 위한 안식

입력 2024.11.27 21:06

수정 2024.11.27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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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어간다. 언제부터 “한 해가 저물다”란 표현이 관용적으로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연말이 가까워질 즈음이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차분해진다. 설렘은 잠시 눌러두고 가만히 올해를 돌아보기 시작해서일까. 꼼꼼한 사람이라면 이미 내년 계획을 세우고 있을 테지만, 기념일 다음날 목격되는 거리 풍경처럼 내게 마무리는 복잡하기만 하다. 좀처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곳곳에 놔두고 온 미련 때문일까, 정리 또한 깔끔하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저물다’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풍경은 어둠일 것이다. 날이 다 저문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처연한 뒷모습을 그려보며 쓸쓸함에 동참하기도 한다. “저무는 인생”이라는 표현이 새삼스럽지 않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사이좋게 나이를 먹으니까.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들뜨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무수한 저묾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음을 깨닫기도 할 것이다.

‘끄트머리’가 끝뿐 아니라 일의 실마리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처럼, 저물고 나서야 시작되는 일이 있다. ‘세밑’이라는 단어가 밑이 아니라 위를 지향하는 것처럼, 저묾과 동시에 이미 어떤 것이 나타나고 있을 수도 있다. 언뜻 2024년 다음에 2025년이 오는 것만이 자명해 보이지만, 우리는 머릿속으로 열 달 전과 15년 뒤를 널뛰듯 상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올해가 저무는 덕분에 이듬해를 기대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와 올해에 그랬듯, 이듬해에도 계획하고 시도하고 다시 보기 좋게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실패를 잊고, 아니 실패를 딛고 또 한 번 이듬해를 맞이할 것이다. 희망은 저물지 않기 때문이다.

때마침 김유진의 장편소설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2024)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수민은 반복되는 좌절을 통해 삶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기대를 저버리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기대감은 탁월한 적응력을 지닌 자생식물처럼 가슴 한편에서 끈질기게 싹을 틔웠다.” 좌절하고 난 다음에서 중요한 것은 ‘좌절’이 아니다. ‘다음’이다. 이는 높은 확률로 기대를 저버릴 것을 빤히 알면서도 우리가 기대를 멈추지 않는 이유다. 끈질기게 다음을 상상하는 이유다.

올가을, 내년 1월에 안식월을 갖겠다고 마음먹었다.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 뒤로 쉬는 날이 따로 없었다. 혹자는 계획대로 쉴 수 있지 않으냐며 프리랜서 생활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했지만, 지난 몇년간 나는 테트리스의 블록을 쌓듯 가능한 한 빈틈없이 일정을 채우고 있었다. 주중에 강연 및 북토크 등을 소화하고 주말에 쉬면 되지 않느냐는 말도 여러 차례 들었다. 그러나 주말은 밀린 원고를 쓰는 시간이었다. 말하기에서 오는 피로를 쓰기가 덜어주는 측면이 있었지만, 쓰는 일 또한 노동이어서 나는 자주 피로를 호소했다. 실은 늘 피로했는지도 모른다. 하물며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는 읽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에는 읽기가 힘겹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일이 말이다.

안식월을 갖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묻는다. 쉴 때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올 예정이냐고. 쉬는 게 불안하지 않냐고 조심스레 덧붙이기도 한다. 나는 안식(安息)은 편히 쉰다는 뜻이라고 답한다. 쉬는 동안 무엇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또 다른 과업이 생겨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자고로 망중한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최고가 아니겠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실은 제대로 쉰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지만 안식으로 얻은 힘이 안목과 식견을 뜻하는 안식(眼識)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기대감으로 편히 쉴 것이다. 다음을 상상하기 위해서, 다음의 중심에 더 단단한 나를 두기 위해서.

오은 시인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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