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세계 최저 탄소배출권
국내 가격, 유럽 10분의 1
중국도 2만원 수준에 근접
정부, 배출권 헐값에 남발
규제 대상 다배출 기업들
되레 배출권 남아서 팔기도
수출 때 관세로 ‘부메랑’
대기업이 중기 감축 돕는
탄소금융 상생까지 망쳐
한국만 조용히 ‘떡락’하는 시장이 있다. 세계에서 제일 싼 탄소배출권 얘기다. 정부의 청사진만 믿고 2021년 말부터 2만~3만원대 배출권을 사들인 증권사 담당자들은 요즘 분통이 터진다. 관계자 A씨의 말이다. “2022년엔 3만5000원까지 올랐던 게 올해는 겨우 1만원이에요. 당장 ‘물린’ 것도 걱정인데 시장의 미래가 안 보이는 게 더 심각해요.”
28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탄소배출권은 t당 1만1100원, 전 세계 최저가 수준에 거래됐다. 전날 유럽연합(EU) 배출권 종가 68.47유로(약 10만600원)의 약 10분의 1에 불과하다. 미국은 물론 중국 역시 지난 9월 t당 100위안(약 1만9300원)으로 국내 탄소배출권 가격을 넘어섰다.
금융권과 기후 전문가들은 ‘헐값 배출권’의 원인이 정부의 느슨한 정책에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 여파가 금융사부터 대기업, 중견·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탄소금융 생태계 전반에 미치고 있다고 우려한다.
국내 배출권은 2020년 연평균 거래가격이 3만원까지 ‘반짝’ 올랐다가 이후 내림세를 지속해 지난해 1만2000원까지 떨어졌다. 올해는 8000~9000원대를 오가다 최근 소폭 반등해 1만원 안팎에서 거래되고 있다.
반면 세계 시장은 활황이다. 런던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배출권 시장 거래액은 8810억유로(약 1290조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의 역성장은 두드러진다. 2020년 1조3385억원이었던 배출권 총 거래 규모는 지난해엔 7096억원에 그쳤다.
기후단체 플랜1.5의 윤세종 변호사는 국내 배출권 시장의 ‘나 홀로 하락’ 원인에 대해 “정부가 ‘물타기’를 한다”면서 “산업계의 이해관계에 휘둘린 느슨한 정책이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기업들 눈치를 보며 배출권을 너무 많이, 무상으로 나눠주고 있다는 것이다.
배출권은 정부가 각 기업에 매년 온실가스 총 배출 허용량을 정해 나눠주는 종량제봉투에 비유할 수 있다. 허용량보다 탄소를 많이 배출한 기업은 모자란 봉투를 사와야 하고, 기술 개발로 탄소 감축에 성공했다면 남은 봉투를 팔 수 있다. 이 같은 자율 거래를 통해 기업들의 탄소 감축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배출권 거래제의 규제 방식이다.
그런데 기업의 실제 배출량보다 정부가 공짜로 나눠준 배출권이 더 많다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배출권이 남아도니 기업은 탄소 감축에 애쓸 필요도, 배출권을 거래할 이유도 없어진다. 규제를 받아야 할 다배출 기업들이 남는 배출권을 시장에 팔며 막대한 부수입을 올리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진다.
국내에선 이 같은 ‘과잉 할당’의 문제가 2015년 거래제 도입 이후 지속·심화되고 있다. 플랜1.5의 추산에 따르면 포스코·현대제철 등 주요 다배출 기업 10개사가 2015~2022년 남는 배출권을 팔아 거둔 수익만 4747억원에 달한다.
과잉 할당으로 배출권이 헐값이 되면서 한국에서 돌아야 할 돈이 해외로 빠져나가게 될 수 있다. 2026년 본격 시행되는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때문이다. CBAM은 EU 밖에서 생산된 수입품에도 EU 배출권 가격만큼의 탄소배출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현재 약 10배에 달하는 EU와 한국의 배출권 가격 차이는, 고스란히 수출 기업이 낼 관세 부담이 된다. 기후솔루션은 CBAM 시행으로 2040년에는 국내 철강업계가 EU에 탄소배출 대가로 연간 1910억원을 내야 한다는 분석을 내놨다.
정부도 배출권 시장 정상화에 나서고는 있다. 내년 2월부터 시장조성자, 증권사 외에도 자산운용사, 은행·보험사, 기금관리자의 참여를 허용했고, 배출권 선물시장과 함께 개인도 투자할 수 있는 상장지수펀드(ETF)나 상장지수채권(ETN) 등 간접투자상품도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업계 반응은 부정적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ETF, ETN 도입은 유동성이 지금처럼 부족한 상황에선 불가능하다”고 했다.
배출권 시장에 참여하는 중소기업은 전체 780여개 기업 중 약 10%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망가진 시장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당초 배출권 거래제가 의도한 탄소금융의 선순환이 허물어진 탓이다.
배출권 시장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탄소 감축을 도울 유인을 제공한다. 배출권이 필요하지만 감축 여력이 없는 기업은 다른 중소·중견기업 등의 감축을 지원하는 외부사업 인증실적(KOC)을 쌓아 이를 배출권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할당배출권(KAU)과 구분해 상쇄배출권(KCU)이라고 부른다. 2019~2020년 LG화학이 중소기업 제일케미텍의 LED·설비 교체 사업을 지원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KOC와 KCU 거래는 현재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KOC의 올해 장내 누적 거래량은 4만1280t에 불과했다. 지난해 거래량 112만t에서 급감한 것이다. KCU의 장내 거래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값싼 KAU가 넘치는 상황에서 대기업이 굳이 외부사업을 벌여 추가로 배출권을 따낼 유인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환경부는 “장외 거래까지 합치면 올해 KOC, KCU 거래량은 전년 대비 0.8% 감소한 수준”이라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