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30대 여성 기자가 야구 붐을 바라보는 짧은 연재 “‘얼빠’ 아니고 ‘야빠’인데요”를 시작합니다. 안타가 뭔지도 모르던 ‘야알못’이 어떻게 ‘야빠’가 되었는지, 야구장 ‘큰 손’이 된 여성 관객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지 함께 이야기 나눠 봤으면 합니다.
📌[‘얼빠’아니고 ‘야빠’인데요①] “야구 룰은 다 아냐”고요?…룰 모르는데 경기를 어떻게 보나요
📌[‘얼빠’아니고 ‘야빠’인데요②] ‘40년 고인 물’ 아저씨 팬이 말했다 “크보는 여성 팬에게 투자하라!”
📌[‘얼빠’아니고 ‘야빠’인데요③] 서울에서 ‘흥참동’ 지방 구단을 응원한다는 것
이 시리즈를 쓰기 전 예상했던 것과 예상하지 못했던 게 있습니다. 예상했던 것은 ‘개인적인 감상인지 기사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여성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첫 회차에 여성 야구팬을 바라보는 차별적인 시선에 대해 쓰고 나서, 지인들에게서 많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입을 모아 “재미있게 잘 봤다. 너무 공감됐다”고 했어요. 평소 문제의식이 크지 않았던 사람도 “그래, 그런 게 있지”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습니다.
기사 말미에는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직접 운동을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남겨달라고 구글 문서를 덧붙여놓았는데요,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의견이 쏟아졌어요.
그중 한 분을 지난 15일 직접 만나고 왔습니다. KIA(기아) 타이거즈 팬 박예린씨입니다.
“스포츠로 남성들과 친해지려고 한다?
집안이 3대째 팬인데 얼마나 억울했는지”
예린씨네 가족은 무려 3대째 기아의 팬입니다. 본가가 전남 여수인데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손을 잡고 광주의 기아 홈구장까지 갔다고 합니다. 스포츠 애호가 집안에서 자란 영향인지 중고교 시절 체대 입시까지 준비했었고요. 지금은 진로가 달라졌지만, 그에게 스포츠란 여전히 인생에서 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야구를 오랫동안 보면서, 아니면 직접 운동을 하면서 ‘이건 좀 이상하다’라고 느낀 게 많으셨나요?”
“야구 경기를 보러 가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 사진을 올리거나 야구계 관련 소식을 공유하잖아요. 그러면 주위에서 ‘쟤는 남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저러는 것’이라고 보는 인식이 있었어요. 스포츠 경기의 주 시청자가 남성이니까 제가 그걸 매개로 이성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 집안이 3대째 팬인데. 얼마나 억울했는지 몰라요.”
LG트윈스를 1997년부터 응원한 ‘소용돌이’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하셨어요. 아주 길게 의견을 남겨주셨는데 조금 다듬었습니다.
“이병규 선수로 입문해서 지금까지 LG 팬인 40대 여자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야구를 좋아해서 룰도 잘 알고 선수들에 대해서도 잘 알았죠. 그렇게 오래 좋아했는데, 제가 야구에 대해 말하면 ‘남자들한테 인기 있으려고 보는 거 아니냐’는 거예요. 남녀를 가리지 않고요.
평소 저는 야구 말고 다른 스포츠도 즐겨보고, 스포츠카나 술 종류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그런데 이게 남자들이 좋아하는 분야라는 이유로 항상 비슷한 오해를 하더라고요.
심지어 취향과 관심사에 대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전혀 관심 없는 남자에게 고백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성스럽다, 남성스럽다 같은 건 누가 정하는 걸까요? 저는 그냥 저고, 스포츠, 자동차, 술을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그 안에 어떤 의도가 있다고 의심받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편하게 ‘덕질’하고 싶어요.”
왜 여성의 취미에만 ‘진정성’을 묻나요
여성 팬에 대한 이런 편협한 시각은 야구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헤소니’님은 이렇게 써주셨습니다.
“제가 헬스를 한다고 했을 때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자세를 제대로 해야 돼. 한번 해 봐, 봐줄게’라는 거였어요. 필라테스를 한다고 하면 ‘그래, 여자 몸에는 필라테스가 좋아’라고 말하고요. 정작 한 번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요!
최근에는 손흥민 선수가 좋아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를 챙겨보는데요, ‘손흥민만’ 응원하면서 축구 본다고 하면 안 된대요. 참나, ‘고귀한 취미’에 저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끼어드는 게 정말 싫은가 봅니다.”
스포츠를 스포츠로, 취미를 취미 그 자체로 즐길 수 없는 환경에서는 팬들이 실제로 특정 공간에서 ‘배제된다’는 감각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쇼타임’님은 여성 팬으로 겪은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실 룰을 모르고 봐도 재밌는게 야구잖아요?
혼자 직관을 많이 가는 편인데, 일부러 사람들 없는 자리를 골랐단 말이죠. 근데 제 앞 혹은 뒤에 남자 무리들이 앉으면서 ‘아, 예쁜 여자 앉았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야구장에 조금이라도 꾸미고 가면 ‘야구선수 보여주려고 꾸미고 가냐’ 고 핀잔을 듣기도 했어요.
성별이 바뀌었다면 들었을 말일까요?
오히려 저 같은 경우, 남성 팬들이 옆의 여자친구에게 과하게 설명하는 바람에 야구에 집중이 안될 때도 많았어요. 외야인데도 멀리 떨어진 투수를 보고 ‘저 공은 서클 체인지 업이다, 커브다’ 하는 식으로 가르치려 하더라고요.”
물론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남성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여성의 ‘애호’에는 ‘순수성’과 ‘진정성’을 의심하는 태도는 여전히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호기심이든 의심이든, 여성 팬을 그저 자신이 편한 어느 한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 김정화 기자 clean@khan.kr
※ 이 기사는 인터뷰이의 요청에 따라 일부 수정되었습니다.
▶ 구글 폼 링크 ( https://t.ly/lm3Ex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