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통계도 안 잡히는 ‘이주노동자 죽음’

정제혁 논설위원
이주노동자 찬드씨가 지난 8월18일 서울 민주노총에서 열린 ‘고용허가제 20년, 무권리 강제노동, 차별과 착취 피해 이주노동자 증언대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주노동자 찬드씨가 지난 8월18일 서울 민주노총에서 열린 ‘고용허가제 20년, 무권리 강제노동, 차별과 착취 피해 이주노동자 증언대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1970년 11월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노동자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참혹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먼저 한 일은 실태조사였다. 평화시장 노동자 126명에게서 받은 설문지를 토대로 이 시장 2만여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과 건강 실태를 고발했다. 126명 중 96명(77%)이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병을, 102명(81%)이 신경성 위장병을 앓았다. 이런 사실이 그때 경향신문 사회면에 보도돼 커다란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은 실태조사가 무엇보다 강력한 고발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업턴 싱클레어는 1906년 발표한 소설 <정글>에서 미 시카고 지역 육가공업체들의 비위생적인 작업 환경을 생생하게 폭로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지시로 정부가 실태를 조사한 결과 현실은 더욱 심각했고, 이를 계기로 순수식품 및 의약품법과 육류검사법이 만들어졌다. 정확한 실태조사야말로 현실을 바꾸고 바로잡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태조사를 한다는 것 자체에 이미 무언가를 개선하려는 결의가 담겨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태조사의 기본적인 도구는 통계이다. 사회적 약자를 판별하는 쉬운 방법이 있다. 통계 대상에서 제외된 집단이 곧 사회적 약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집단이 처한 상황을 드러내 바꾸려는 문제의식이 부재하고, 사회적 의지도 박약하다는 뜻이다. 노동권 확대의 역사가 비정규직·플랫폼노동 등의 통계 작성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통계에서 제외됐다는 건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자체가 시민권·노동권의 부재 증명이나 다름없다. 이주노동자 관련 통계의 미비가 대표적인 예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최근 인권위 의뢰를 받아 수행한 ‘이주노동자 사망에 대한 원인 분석 및 지원체계 구축을 위한 연구’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국내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주노동자 3340명 중 2267명은 행정시스템에 최소한의 사망 정보도 없다. 매년 2000명 이상의 이주노동자는 누가, 언제 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죽음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되 사회적으로 지워진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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