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자락,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때다. 창문 아래 빈 의자에 신문에서 오려낸 빛바랜 사진 세 장이 놓여있다. 모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진이다. 하나는 라파의 난민촌 사진이다. 한 소녀가 쪼그려 앉아 물 한 컵으로 설거지를 한다. 앞에 놓인 빈 냄비 세 개에 무엇이 있었을까? 뭘 먹기는 했을까? 소녀는 무표정하다. 무표정한 얼굴 속에 감추어진, 그 또래가 감당해서는 안 될 경험을 생각해본다. 다른 두 사진을 보니, 이스라엘이 소개령을 내린 칸유니스에서 사람들이 한밤중에 피란길에 나섰다.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짊어진 보따리가 단출하다. 짐이 줄어든 만큼 삶이 파괴되었다. 엄마 손을 잡은 아이는 다른 손으로 물 한 통을 움켜잡고 있다. 이들도 표정이 없다. 그 무표정함 속에 숨겨진 절망과 분노를 가늠해본다. 내가 사는 수녀원 뜰에서 재잘대며 마음껏 뛰노는 이곳 아이들의 모습과 겹치면 어느 한쪽이 비현실처럼 보인다. 혼란스럽다.
가자지구 보건부는 전쟁 발발 1년째인 지난 10월7일 기준 총 4만1909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매일 약 115명이 살해됐다. 어린이 사망자는 3명 중 1명꼴로 첫돌 이전에 죽은 영아만 700명이 넘는다. 사람들은 거주지와 난민촌에서, 대피소와 병원에서, 심지어 구호 차량 앞에서도 피살됐다. 부상자 10만명에 실종자도 2만명이 넘는다.
매일 115명이 살해당해
지난 1년여 가자지구의 참극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다. 마음대로 죽여도 되는, 저주받은 인간 ‘호모 사케르’의 무차별 살육이다. 물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도, 유대인 학살도 그랬다. 사실 이런 만행은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양상만 달리하여, 암묵적이거나 노골적으로, 종종 ‘국익’이란 이름으로 행해진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당장 지난 6월 아리셀 참사에서 드러난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과 태도를 생각해보자. 그들에게는 우리가 바로 ‘이스라엘’일 수 있다. 이스라엘을 비판할 때 ‘우리 안의 이스라엘’ ‘우리 주위의 이스라엘’도 함께 반성해야 하는 까닭이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소년이 온다>는 작가가 “압도적인 고통”으로 썼다고 밝힌 소설이다. 예전에 나도 계속 읽기가 힘들어 책을 덮었다 펼쳤다 했던 기억이 난다. “저건 광주잖아.”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용산참사를 보고 바로 광주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아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광주’는 이미 1947년 제주라는 고립된 섬에서, 그리고 다시 2009년 서울 용산의 허공에 고립된 망루에서 일어났다. 어디 그뿐이랴.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도 일어났다. 그리고 2007년 분리장벽으로 봉쇄된 가자지구는 지금껏 고립된 채 짓밟히고 훼손된 것 그러나 훼손되지 말아야 할 것의 대명사가 되었다. 스웨덴 한림원이 선정 이유로 밝힌 작가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은 제주와 광주를 넘어 오늘 가자지구는 물론 고립된 채 폭력을 견디는 세계 모든 곳을 보듬는 애도와 연민의 서사다.
우리는 ‘광주의 정신’을 살리지 못했다. 광주항쟁 당시 양동시장 상인들이 시민들에게 나눠준 주먹밥에 들어있던 연대와 협동의 공동체 정신을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 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은 이제 희미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러는 사이 자유의 이름으로 경쟁과 효율만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확고해졌다. 각자도생과 승자독식의 질서에 순응한 우리는 약자와 소수자들이 삶 밖으로 밀려나는 걸 방관한다. 언제 내 차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타자의 고통을 잊지 말았으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가자지구에 보내는 연대는 우리 내면과 주위에서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들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거듭 물어야 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많은 사람이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었고 또 읽을 것이다. 아무쪼록 작가의 글 곳곳에 스며 있는 세상을 향한 호소를 마음에 새겼으면 한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타자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모여 세상을 감쌀 때 저 빛바랜 사진 속 난민촌 소녀도 무표정을 거두고 옅은 미소를 띤 채 “밝은 쪽으로, 빛이 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