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 공동 구매를 제안하며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2015년, 박근혜 정부는 역사교과서가 좌편향이라며 새로운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을 추진했다. 역사를 정권 입맛에 맞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학계와 시민사회의 비판이 거셌다.

사안의 중대성과 별개로 당시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작은 뉴스가 하나 있었다. 은퇴한 노교수가 국정 역사교과서의 대표 필진으로 초빙된 사실이 알려지자, 제자들이 대거 몰려와 그를 만류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예정된 기자회견에 불참하기까지 했다. 그의 정치색이나 학문적 역량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스승의 잘못된 결정을 말리기 위해 모여든 제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고 흥미로웠다. 그동안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장면 아닌가. 결국 성추문 때문에 사퇴하는 어이없는 결말을 맞기는 했지만, 공적 활동을 하는 사람일수록 저런 종류의 ‘안전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우리는 온갖 이상한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과거를 뒤집는 갈지(之)자 행보를 서슴지 않는 정치인과 지식인, 논객들을 여럿 보아왔다. 살다보면 사회에 대한 시각, 삶의 지향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나름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해왔던 이들이 지식과 언변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상한 결정과 변절을 합리화하는 모습은 개인적 안쓰러움을 넘어서 사회적 해악이다.

듀나 작가의 단편소설 <구부전>에는 주리론(主理論)을 신봉하던 영남 지방 유학자가 등장한다. 그는 어떤 사건을 겪고 좀비로 변하는데, 이후 열혈 주기론(主氣論)자로 변신하여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좀비가 인간을 지배하는 새로운 계급사회의 논리를 만들어내려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어우, 지긋지긋하다’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 감정은 소설 이전에 현실 정치를 보며 쌓아온 것이리라.

누가 봐도 이상한 결정을 내리는 이들을 보면, 주변에 저걸 말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아마도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아무리 충고를 해도 듣지 않거나 오히려 ‘격노’하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해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가능성이다. 한국인 누구나 떠올리는 사례가 있을 테니 더 이상 설명하지는 않겠다. 두 번째는 유유상종(類類相從), 지나치게 비슷한 무리 안에서만 어울리다 보니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이 전체 사회의 규범과 윤리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가능성이다. 지금 우리 사회 문·이과 대표 엘리트들이 보여주는 기이한 행태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절대 그렇게, 나쁜 쪽으로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지금 이상하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2015년 그 뉴스를 접한 후 여러 분야의 친구와 후배들에게 부탁했다. “혹시 내가 이상해지는 기미가 보이거든, 옛정을 생각해서 부디 뜯어말려다오! 말을 듣지 않으면 일단 휴대전화를 빼앗고 지게에 번쩍 실어서 산속으로 들어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찾아본 경량 지게의 가격도 알려주었다. 하도 여러 번 이야기했더니, 하루는 루프박스가 장착된 중고차를 구매했다며 후배에게 연락이 오기도 했다. “이제 지게 필요 없어요. 선배는 키도 작으니 여기 쏙 들어갈 거예요!”

다행히 아직까지 내 앞에 지게꾼이나 루프박스가 나타난 적은 없다. 어쩌면 지게꾼들의 존재 자체가 경거망동을 막는 안전장치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칼럼처럼 공론장에서 말할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특별한 기회이며, 그렇기에 사회에서 말과 글로 활동하는 이들일수록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가능성을 경계하고 대비해야 한다. 이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자 다른 이들에게 건네는 제안이기도 하다. 지게 공동구매와 만류 품앗이를 조직해 두자.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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