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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연고 시민 장례식

지난 11월14~16일에는 어느 무연고 시민의 장례가 치러졌다. 장애가 있었던 고인이 법적 무연고자인 이유는 그가 유아일 때 유기된 상태로 발견되어 아동시립병원을 거쳐 시설에 들어가 36년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시설에서 나온 후 어느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으나, 이때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연고자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현행 장사법 체계상 무연고자 사망 시 일단 상속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가족’을 찾아야 한다. 연고자의 존재 유무는 행정정보시스템을 통해 바로 확인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어 연고자가 있다면 그들이 시신을 인수할 것인지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다. 고인이 관계를 맺어 왔던, 기꺼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할 이들에게 장례를 치를 자격이 주어지는 건 그다음이다. 이는 상황에 따라서는 자칫 고인의 시신이 차가운 안치실 안에 불특정 기간 동안 누워 있어야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다행히 고인의 장례는 지연되지 않고 진행되었다. 고인의 생전 공동체였던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식구’들이 보여준 적극적 의지 덕에 가능했다. 아니, 처음부터 조마조마할 일이 아니어야 했다. 장애인들의 탈시설과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단체들은 고인과 같은 사례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법령 정비를 제안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참에 탈시설 장애인뿐 아니라 노숙인과 독거노인 등 다양한 이유로 법적 무연고 상태로 생을 마감하는 시민들의 공영장례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이번 장례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삶이 마지막 길을 걸을 때 발생하는 법적 사각지대를 보여주었다. 첫째, 어떤 이들, 특히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이들은 어린 나이에 가족과 단절되는 경우들이 있다. 고인은 어릴 때 유기된 채 발견된 후 전혀 가족과의 교류가 없었다. 거의 평생을 보낸 시설들은 ‘또 하나의 가족’을 이룰 만한 다정한 공간이 아닌 데다, 중간에 전원이라도 하면 모든 관계가 다시 시작된다. 둘째, 어떤 이들은 장사법과 같이 가족을 중심에 놓은 법령의 바깥에 놓여 있다. 고인의 경우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함께 일했던 이들과 동료이자 가족 같은 관계를 맺었지만, 이들은 고인에게 법적 연고자가 없음이 증명된 후에야 고인을 자신들의 손으로 보내줄 수 있었다. 현행 법령은 고인의 존엄한 장례보다 관계가 끊긴 가족의 의사를 앞에 두고 있다. 가족 관계가 사회 제도의 근간인 한국 사회에서 이런 제도가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법이 고인의 죽음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지극히 평균적인 사람들의 삶만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심지어 장애인이 시설에서 사망한 경우의 절차는 마련되어 있다. 그렇다고 모든 무연고 장애인이 시설에서 사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연고자 문제로 인해 고인이 남긴 얼마간의 유류 재산조차 당장 고인의 장례나 유지에 쓰이지 못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고인이 한땀 한땀 모은 돈이라도 국고나 시설에 귀속된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은 가족의 의미를 되묻는다. 장애인, 탈가정 청소년, 독거노인, 노숙인 등은 혈연이 아닌 관계의 가치, 혈연이 끊긴 삶의 처지를 법이 인지하고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많은 영역에서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동시에 현재의 법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정상 가족은 해체되고 있다. 수많은 저소득층 노령자들과 장애인들은 연락이 두절된 가족의 소득 때문에 기초생활보장수급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열악한 삶을 지탱해 왔다.

혈연에 기반한 가족은 이 사회의 기본 단위이기는 하지만 가장 친밀한 관계의 전부는 아니다. 고인의 죽음도 법적으로는 혼란스러웠지만 사회적으로는 외롭지 않았다. 15일 밤에 열린 추모식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가 남긴 영상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그의 영정 앞에서 추모사와 꽃을 바쳤다. 그 눈물은 그들이 가족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장애인들의 지역사회 정착 지원 정책이 시행되는 오늘날 현재의 장사법은 무연고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생을 마감하던 시대의 유산이다.

죽음은 평등하다지만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유만으로 평등한 것은 아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이들이 주변에 있는 상황에서 차가운 냉동고에 안치되어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고인의 장례는 제때 치러졌지만, 존엄한 장례가 행운이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 손에 떠나갈 권리가, 국가는 이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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