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법 ‘핀셋’ 개정···“재계와 두더지잡기 하자는 개악”

윤지원 기자
김병환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일반주주 이익 보호 강화를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방향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12.2

김병환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일반주주 이익 보호 강화를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방향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12.2

정부가 2일 발표한 자본시장법 개정 방향은 최근 잇따라 발생한 소액주주 권한 침해 문제를 예방하면서도 상법 개정시 소송 남발 등을 우려하는 재계의 입장을 고려한 절충안이라 할 수 있다. 기업 경영활동의 불확실성이 높아진다는 이유로 실체법을 고치는 대신 합병 절차를 보완하는 수준에서 그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핀셋 규제’는 다양한 수법으로 진화하는 대주주의 일반주주 권리 침해 사례를 막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개악”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2일 브리핑에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모든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시 비상장 중소·중견기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그 대상을 상장법인으로 축소해 불확실성에 놓이는 기업 수를 줄이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 기준 자본시장법 적용 대상인 상장법인은 2464개, 비상장법인은 102만8496개다.

기업이 지켜야 하는 합병 절차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합병 절차만 잘 지키면 이사회 면책이 보장돼 기업의 경영활동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구상엽 법무부 법무실장은 “대법원의 종국적 판단을 받기 전까지는 (일반주주의 이익인지 손해인지) 알 수가 없다”며 “(상법 개정은) 실효적인 치료법이 될 수 없고 기업 가치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당초 충실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주장했다가 최근 합병 절차를 고치는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금감원은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겠다”며 입장 변화 이유를 밝혔다.  2024.11.28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당초 충실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주장했다가 최근 합병 절차를 고치는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금감원은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겠다”며 입장 변화 이유를 밝혔다. 2024.11.28

정부 “절차 규정 명시해 예측가능성 높여”
전문가들 “지배주주 사익편취 정당화 우려”

하지만 전문가들은 상법 개정을 합병 중심의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선회한 건 후퇴라고 지적한다. 절차만 추가하는 ‘열거식’ 규제는 일정 요건만 지키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두더지 잡기’식으로 규제를 더해야 하기 때문에 글로벌 스탠다드에도 맞지 않는다. 미국 모범회사법(8.31조)도 이사의 책임 기준에 회사 또는 주주라고 적시한 ‘원칙적’ 규제다. 정부는 자본시장법 개정안는 상장법인의 합병은 주주의 정당한 이익이 보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할 예정인데, 이는 일반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적시한 야당의 상법 개정안보다 후퇴한 것이다.

이상훈 경북대 교수는 “열거하지 않은 다른 부분에서 규제가 뚫려 일반주주 이익을 침해하는 신종 수법이 나오면 막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도 “2009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에서 대법원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로 명시하면서 회사 이익과 주주 이익이 별개가 되는 판례가 나온 뒤 시작된 문제”라며 “입법적으로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하자는 것이고, 전세계 모든 나라가 원칙적으로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고 했다.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도 “절차적인 규정은 오히려 지배주주의 사익 편취를 강화하고 정당화시킨다는 면에서 퇴행이고 개악”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자본시장법 개정안 주요내용 사진 크게보기

정부의 자본시장법 개정안 주요내용

김 위원장은 이날 “자본시장에서 일반주주 보호가 미흡했다는 케이스는 대부분 재무적 거래”라고 했지만, 현실에선 일반주주 이익을 훼손하는 다양한 수법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특정인에 대한 자사주 처분 및 일감몰아주기 등 용역계약, 경영권 방어를 위한 유상증자, 지배주주에 과도하게 유리한 급여체계, 우호지분 확대를 위한 무상증여 등이다.

최근 문제가 된 HL홀딩스의 무상증여가 대표적 예다. HL홀딩스는 지난달 이사회에서 자사주 47만주를 향후 설립할 비영리재단에 무상 증여한다고 공시했다가 주주 반대에 부딪혀 철회했다. 회사 측은 ‘사회적 책무 실행’을 무상증여 배경으로 밝혔지만, 사실상 최대주주 우호지분을 늘리기 위해 재단을 거쳐 자사주 의결권을 부활시키려는 의도로 시장은 해석했다. HL홀딩스 2대 주주인 VIP자산운용 김민국 대표는 “20년간 상법, 공정거래법, 자본시장법 조항을 개별적으로 고쳐왔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결에는 모두 실패했다”며 “지배주주의 사익편취 행위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는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 도입이 필수”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제3자 배정을 통한 유상증자나 자기주식 처분에 따른 일반주주 피해 등에 대해 “더 제도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들여다보겠다”고 말했다.


Today`s HOT
미국의 폭설로 생겨난 이색 놀이 인도네시아의 뎅기 바이러스로 인한 소독 현장 인도네시아의 설날을 준비하는 이색적인 모습 휴전 이후의 가자지구 상황
가자-이스라엘 휴전 합의, 석방된 팔레스타인 사람들 다수의 사망자 발생, 터키의 한 호텔에서 일어난 화재..
중국의 춘절을 맞이하는 각 나라들의 모습 각 나라 겨울의 눈보라 치고 안개 덮인 거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베를린 국제 영화제 위한 곰 트로피 제작 세계 지도자 평화와 화합 콘서트의 홍타오 박사 타이둥현 군 기지를 시찰하는 라이칭 테 대만 총통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