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필화’ 정리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필화란,
텍스트 향한 제재뿐 아니라
의사표현에 대한 모든 국가폭력
현대사 격랑 속 희생자 얼마나 많았나
“이승만 동상을 세운다고 하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이승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 빨리 냈습니다.”
<한국 현대 필화사 1>을 출간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당초 3권을 동시에 출간하려던 계획을 바꿔 1권을 먼저 낸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2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승만 이데올로기는 4·19 혁명으로 끝이 났다. 지금에 와서 동상을 세우고 다시 우상화하는 것은 헌법정신을 위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임 소장이 1945년 8·15 이후부터 오늘날 윤석열 정권에 이르기까지 80년에 걸쳐 일어났던 필화의 전모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결과물이다. 2016년 경향신문 70주년 창간기획으로 연재했던 ‘임헌영의 필화 70년’에서 범위를 확대하고 내용을 보충했다. 1권은 ‘미군정부터 이승만 집권기의 필화’를 다뤘고 내년 출간을 목표로 하는 2, 3권은 각각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까지’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를 다룬다.
임 소장은 이 책에서 문학 예술사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언론 등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중요 필화사건을 두루 섭렵한다. 그는 “‘필화’의 개념을 이 책을 쓰면서 완전히 바꿨다”며 “필화라고 하면 붓으로 쓴 문학작품만 생각하는데, 붓은 자기 의사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에 불과하다. 글을 비롯해 모든 형태의 발언, 행위와 활동 전반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제재받는 텍스트가 없더라도 개인과 집단의 의사표현 행위에 대한 국가폭력의 총칭이 곧 필화라는 의미다. 그런 맥락에서 현 정부가 나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고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려고 추진하는 것 또한 필화의 일종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필화의 기본은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라며 “8·15 이후 한국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미국 헤게모니하에서 형성된 이데올로기, 반소·반공·반중이었다”고 말했다. 임 소장은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을 반대했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최능진을 여순항쟁과 관련시켜 제거한 사건 등을 기술하며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조봉암 등의 죽음도 필화다”라고 주장했다.
언론에 대한 탄압도 빼놓을 수 없다. 임 소장은 1959년 일어난 경향신문 폐간 조처를 현대 한국언론사상 가장 가혹한 필화사건이라고 꼽았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신문 발행 허가 취소는 물론, 경향신문이라는 이름도 쓰지 못하고 사옥 정문도 열어놓지 못하게 할 정도로 신문사의 흔적을 없애려고 했다. 그는 “자유당 때의 경향신문은 반이승만 언론이었다. 이승만이 경향신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며 “집권세력의 시선에서 보자면 아예 이 신문은 없애버려야 이듬해의 선거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 것이기에 선거 준비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책은 ‘중도파 지식인 오기영의 좌절’ ‘박태준과 박치우 두 지식인의 비극’ ‘만담가 신불출의 설화’ ‘여순항쟁과 가수 남인수의 여수야화’ 등 혹독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 필화를 겪은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망라하고 있다.
그는 “한국 현대사는 세계 지성사에서 필화가 가장 많았던 격랑의 연속이었다”며 “그 격랑을 하나하나 통찰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담하게 희생당했고 고난의 생을 보냈던가를 상기하면 그 어떤 통곡으로도 원혼을 달랠 길이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