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무기 연료로 쓸 석탄이 많이 필요했다.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 탄광도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일하겠다는 일본인들이 별로 없었다. 안전 기준도 무시한 채 바닷속 갱도를 낸 해저 탄광이었기 때문이다. “위험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일본은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동원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1942년 2월3일 갱도로 바닷물이 흘러들었다. 183명의 광부가 숨졌다. 그중 136명(약 74%)이 조선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고가 있었는지, 이런 탄광이 존재했는지조차 잊혔다. 40년이 지나서야 인근 마을 주민들이 ‘순난자(殉難者)의 비’를 세웠다. 비석 어디에도 ‘강제로 끌려와 희생된 조선인’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들 이야기는 비석에서도, 역사에서도 지워졌다.
어떻게 이런 잔혹사를 알 수 있게 된 걸까? 역설적이게도 이 역시 일본인들 덕분이었다. ‘조세이 탄광의 물비상(수물 사고)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다.
이 모임은 제12회 리영희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난 2일 시상식장에서 이노우에 요코 공동대표(74)를 만났다. 그는 “일본인의 ‘자기만족 운동’ 아니었나 하는 자책감도 든다”며 “(오랜 시간이 걸렸음에도) 인내심 있게 저희들을 신뢰해주신 유족 여러분의 관용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모임은 재일조선인 강제지문 날인 거부 운동을 지원하던 지역 시민들의 모임이었다. 모임의 전 대표이자 지역 향토 사학자였던 야마구치 다케노부(2015년 사망)씨는 조세이 탄광 사고를 조사하던 중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인권 문제까지 포함한 문제’라는 걸 인식했다. 모임은 ‘순난자의 비석’이 감춘 진실을 밝히기로 했다.
우선 비석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돌려주기로 했다. 일본식 이름으로 바뀐(창씨개명) 조선인 희생자들 명부를 확보해 호적상 한국 주소로 일일이 편지를 보냈다. 한국의 유족들이 돌아오지 못한 아빠나 오빠들의 최후를 알게 된 것도, 1992년 ‘조세이 탄광 희생자 대한민국유족회’가 결성된 것도 이 덕분이다.
관할 자치단체인 우베시는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희생됐다’는 비석 도안의 문구를 문제 삼아 협조를 거부했다. 일본인 시민들이 직접 나섰다. 1600만엔에 달하는 성금이 모였다. 2013년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를 세웠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 희생자 136명의 한국 이름이 새겨졌다.
모임은 희생자들에게 ‘가족의 품’도 돌려주기로 했다. 2014년부터 일본 정부에 수몰된 희생자들의 유골 발굴을 호소했다. 답은 없었다. 이번에도 시민들이 나섰다. 한국과 일본에서 1200만엔(약 1억1000만원)의 성금이 모였다. 공사를 맡겠다는 일본 업체와 자원봉사하겠다는 일본인 잠수사도 나타났다. 지난 9월19일 발굴 조사를 시작했고, 25일 갱도 입구를 발견했다.
“일본 사람들은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어요. 그런 사실(강제노역) 자체를 몰랐죠.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 (유골)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일본 정부는 한결같았다. 유골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모임의 요구에 지난달 5일 “해저 갱도의 안전성을 확인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번에도 시민들이 나선다. 내년 1월31일부터 나흘간 유골 발굴 작업을 재개한다. 이노우에 대표는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골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을 묻는 증인”이라며 “다음 작업 때는 유골 한 조각이라도 반드시 가지고 나오겠다”고 했다.
이들 역시 수십 년간 한결같다. 일본인인 그들은 왜 조선인을 돕는 걸까? 자부심과 거리가 먼 역사를 굳이 밝히려는 이유를 물었다. 이노우에 대표는 “(일본 정부나 우익 인사들은) ‘일본의 국익이 우선’이라고 얘기하곤 한다”며 이렇게 답했다.
“진짜 국익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밝혀 반성하는 국가’의 품위를 갖추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한일 간 ‘미래지향’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지워진 역사를 다시 새겨넣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