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여섯 시간만에 무위로 끝났지만 국가 신인도가 크게 훼손될 우려가 커졌다. 그동안 주요 신용평가사는 한국의 정치제도가 경제의 불확실성을 해소한다고 높게 평가했는데, 비상계엄 조치가 촉발한 정치 혼란과 국정 진공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가뜩이나 부진한 한국 경제 전반에도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금융시장은 4일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정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코스피는 외국인 매도 행렬로 한때 2440선까지 밀렸고, 원·달러 환율은 2년여 만에 달러당 1410원대(주간거래 종가 기준)로 올라섰다.
이번 비상계엄 선포는 국가신용등급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한국의 정치 안정성은 신평사들이 꼽은 신용 등급의 긍정적 요인이었다. 스탠다드앤푸어스(S&P)는 지난 4월 한국 국가신용등급과 전망을 ‘AA,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한국의 민주적인 정치제도는 지속가능하고 균형 잡힌 성장의 기반”이라고 평가했다. 안정적인 정치제도로 주요 경제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국가신용등급은 정부채무 불이행 가능성 여부를 측정하는 지표로, 한 국가의 경제적·정치적 위험도를 반영한다.
실제 피치(Fitch)는 지난해 8월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강등하면서 미 ‘의사당 폭동’ 사건을 배경으로 지목했다. 2021년 1월6월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승리에 불복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연방의회 의사당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 미 정치환경 양극화를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예산안 단독 감액안 처리를 강행하자 “예산 등 정책 결정 과정의 불확실성이 국가신용등급에 부정적 영향을 준 해외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했다.
3대 신용평가사인 무디스와 스탠다드앤푸어스, 피치는 전반적으로 한국 신용등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왔다. 그러나 안보 상황이 불안해지거나 경제 위기 때마다 신용등급을 낮추거나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무디스와 S&P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국가 신용등급을 처음 하향 조정했다. 200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2008년 금융위기가 일어났을 때는 등급은 유지됐지만, 전망이 하향 조정됐다.
전문가들은 이번 비상계엄 사태로 당장 대외신인도에 미치는 영향은 적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아직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나 지속 기간 등을 평가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S&P도 이날 NICE신용평가와의 공동세미나에서 비상계엄 선포로 한국의 신용등급 강등을 고려하진 않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정치 불확실성이 지속되면 경제에도 악영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당장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등으로 대외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내각 총사퇴마저 현실화되면 혼란은 더 커질 전망이다. 이미 비상계엄 후폭풍으로 소상공인·자영업자 대책 등 주요 정책 발표 시점이 미뤄지고 있다.
킴엔 탕 S&P 아태지역 신용평가팀 전무는 “정치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누적될 경우 장기적으로 (신용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도 “정치적 갈등이 지속되면 소비와 투자심리가 모두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