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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의 초현실적 한국 방문기

12월3일 새벽, 인천공항 6번 게이트 앞.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그마한 사람이 온화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게 해서 미안해요. 수고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는 악수를 청하고는 내 차 뒷자리에 올라탔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였다. 그는 “민주주의와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제로 강연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버틀러 교수가 내 차에 타고 있단 사실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단순히 그가 ‘빅네임’이라서가 아니었다. 10여년 전 <젠더트러블>을 처음 읽었을 때 느낀 충격과 흥분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 책에서 평생 느껴왔던 어떤 불편함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바로 ‘젠더 수행성’이라는 개념이다.

젠더 수행성이 뭘까? 누구는 이것이 세상을 망치는 ‘사탄 언어’라며 반발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다. 이렇게 한번 설명해 보자.

대한민국에선 이제 임신 32주 이전에 태아 성별고지가 가능해진다. 12월2일 국회에서 관련 내용을 담은 의료법 일부개정안이 통과됐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분홍신을 준비하세요” 같은 말을 할 필요 없이 “딸입니다”라고 하면 된다. 궁금하다. 왜 이렇게까지 태아 성별을 알고 싶어하는 걸까? (물론 외부성기에 따라 권력을 배분하는 가부장제 때문이다.)

못지않게 이상한 건 성별이 ‘분홍신’ 혹은 ‘파란신’과 함께 온다는 것이다. 외부성기 모양으로 인해 부여된 이 ‘여자다움’ 혹은 ‘남자다움’의 기대는 평생 나를 따라다닌다. 나는 “여자아이가 어디서”라는 말을 들으며 여자로 길러졌다. 내 오빠가 “남자답지 못하게”란 소리를 들으며 오랜 시간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젠더 수행성이다.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이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분홍신”이라는 말과 함께 따라오는 사회적 약속에 맞춰 특정 행위들을 흉내 내고 반복하고 또 연기함으로써 체득된다는 것. 그러므로 그 반복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나’를 그려나갈 수 있게 된다. 사실 그렇게까지 천인공노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일부 기독교인들은 “젠더주의 세계관”이라는 기이한 단어를 만들어 버틀러가 그 세계관의 주요 이데올로그라며 공격해왔다. 그들은 젠더주의 세계관이 ‘우리가 알던 세계’를 파괴한다고 주장하고, 여성과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소수자가 인간이자 국민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동등한 권리를 공격해왔다. 또한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난폭한 남성’이라는 또 다른 젠더를 부착시킴으로써 특정 종교를 차별하고 난민을 박해한다.

버틀러는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는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기후위기, 전쟁, 난민화, 신자유주의에 의한 사회보장 축소, 구조적 인종차별 등 실제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현실이 너무 많다. 그러나 “국가, 교회, 정치 운동 등 권력들은 ‘젠더’라는 환영을 유통시켜 사람들을 겁먹게 하고” 이런 현실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만들어 “검열을 받아들이고, 두려움과 증오를 취약한 공동체에 돌리도록 한다”. 젠더에 대한 공격이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공격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인 이유다.

12월3일 밤. 또 다른 초현실적 사건이 벌어졌다. ‘대통령’이라 불리던 자가 근거 없는 공포를 앞세워 계엄령을 선포했다. 4일 아침 버틀러 교수를 만나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는 “계엄 무력화야말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스템의 승리 아니냐”라고 말했다. 나는 “아직 아니다. 지금부터 승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답했다.

버틀러는 민주사회를 세우기 위해선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 상상의 권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제왕적 대통령제와 양당제를 넘어 완전히 다른 미래를 그릴 시간이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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