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인간적인 건축’에 대하여
토마스 헤더윅, 요즘 이른바 건축계에선 이 이름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헤더윅이 쓴 책 「Humanise」가 최근 국내에 <더 인간적인 건축>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은 마치 혁명기 대중의 각성을 선동하는 팸플릿 같다. 이 혁명에서 칼 마르크스의 지위는 안토니 가우디(1852~1926)가 맡는다. 혁명가의 손에 <공산당 선언>이 있다면, 건축가의 눈은 ‘까사 밀라’를 향해야 한다. 가우디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지은 이 집은 외벽이 물결치듯 굴곡져 전체적으로 조소 작품 같은 기운을 풍긴다. 헤더윅은 가우디의 디자인에 경외심을 감추지 않는다.
반면 르코르뷔지에(1887~1965)와 미스 반데어로에(1886~1969)는 타도 대상이다. 헤더윅이 보기에 두 사람의 건축 디자인은 너무 밋밋하고 직선적이며 단조롭다. 특히 르코르뷔지에는 ‘따분함의 신’, 그의 수많은 저작에서 정립된 모더니즘 건축은 ‘컬트’다. 건축계가 헤더윅에 언짢은 건 이 때문이다. 두 사람의 제자 중엔 한국인도 있었고, 그들이 귀국해 한국에 현대 건축의 씨를 뿌렸다. 그 토양에서 성장한 건축가들이 많다. 르코르뷔지에와 미스 반데어로에에 대한 공격은 뿌리를 긁는 일이다. 그것도 아무 계보도 없는―건축이 아닌 미술과 디자인을 공부했고, 건물을 디자인하지만 영국에선 법적 건축가로 인정받지 못하는―헤더윅이! 그런 헤더윅이 한강 노들섬 국제지명설계공모 당선,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 임명 등 국내를 종횡무진으로 누빈다.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간다.
물론, ‘국제지명설계공모’란 허울 아래 저명한 해외 건축가를 초청하고 국내 건축가를 들러리 세우는 건 명백한 구태다. 노들섬 공모가 딱 그래 보였다. 게다가 헤더윅은 현재의 노들섬을 무신경하게 “감동 없는 (상태)”라고 평했다. 2000년대 초 오페라하우스 건설 계획 이후 노들섬을 둘러싼 논쟁의 역사를 그는 잘 모를 것이다. 생태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며, 오페라하우스보다는 더 많은 시민에게 열린 대중음악 시설을 대부분 지하에 파묻는 형태로 나지막하게 세운 지금의 노들섬 라이브하우스가 그 격론의 결과다. 지난한 과정을 아는 사람에겐 어느 날 서울에 뚝 떨어진 듯한 영국인 디자이너의 일갈이 매우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헤더윅이 노들섬에 제시한 아이디어가 서울에, 현대 도시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귀담아들을 만하다. <더 인간적인 건축>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하다. 헤더윅은 오늘날 건축에 ‘감정의 기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건물을 보는 사람이 받는 느낌 그 자체라는 거다.
건물이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주는 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예쁘다, 별로다, 친숙하다, 낯설다, 시원하다, 답답하다 등등. 그래서 얼핏 헤더윅의 말은 하나 마나 한 소리 같은데, 관점을 역사적으로 늘여보면 그렇지 않다. 건물에서 감정을 느낄 만한 요소를 박멸하다시피 한 건축 운동이 모더니즘 건축이었다. 그 시조로 지금까지 추앙받는 인물이 르코르뷔지에와 미스 반데어로에다. 그들은 대체로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능’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르코르뷔지에는 건물이 여객선이나 비행기 같은 철저히 기능적인 기계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건물을 대량생산하는 시대를 꿈꿨다.
모더니스트들은 가장 가까운 거리가 직선거리이듯 건물도 직선으로 구성해야 가장 기능적이라고 봤다. 벽을 기능적인 창과 창이 아닌 부분으로만 나누자, 섬세하게 조각해 짜맞춘 몰딩은 불필요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적을수록 좋다’, 심지어 ‘장식은 범죄다’ 같은 격언이 횡행하며 건물은 지극히 단순해졌다. 우리가 도시에서 매일같이 마주하는 벽은 따분한 어떤 것이 된 이유다. 장식과 곡선을 철저히 배격하고 기능과 직선만을 남긴 현대 건축, 헤더윅은 이것이 인류의 감정을 말살하는 전 지구적 재앙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모더니즘 건축을 전복하려는 자신과 동지들의 활동을 ‘인간화 운동(humanise campaign)’이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헤더윅의 호들갑이 좀 지나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확신은 그의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것일까? 헤더윅의 어머니는 앤티크 가게를 운영했다. 그곳에서 파는 물건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자. 기능을 중시하는 시각에서는 매우 조잡하고 낭비적이고 쓸모가 부족한 것들이다. 그런 물건에 둘러싸여 자랐을 헤더윅을 상상하면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럼, 지금 우리 아이들이 처한 환경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은 ‘아파트 공화국’에서 나고 자란다. 아파트는 그야말로 기능적인 집이다. 아파트로 가득 찬 도시에서도 아이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충분하다고, 이 도시가 족히 인간적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르코르뷔지에는 ‘빛나는 도시’란 계획안을 통해 파리 중심부를 고층 건물로 가득 채우겠다는 야심을 표현했다. 이 그림을 보면 영락없이 한국의 아파트 단지가 떠오른다. 오죽하면 르코르뷔지에가 꿈꿨던 도시가 파리가 아닌 서울에 구현됐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현대 건축을 향한 헤더윅의 일갈
“인류의 감정 말살하는 지구적 재앙”
거리를 점령한 고층건물과 아파트
기계적 직선만이 지배하는 공간서
사람들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집 주변을 벗어나 거리로 나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헤더윅은 <더 인간적인 건축> 맨 앞 장에 ‘행인을 위하여’라고 썼다. 그는 실로 행인이 건물에서 느낄 감정을 중요시한다. 건물은 안팎으로 존재한다. 내부의 사용자보다 오히려 외부의 관찰자가 더 많다. 책을 덮고 나가 행인으로서 걸어보길 권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서울 중심부 중 하나인 광화문 일대다. 종로·신문로 변의 건물에서 헤더윅이 말하는 따분함을 벗어나려고 애쓴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오히려 단순한 직선이 통제하고 지배한다. 이 거리엔 오로지 새카만 직사각형 모듈이 반복적으로 채워진 SK서린빌딩(1999)이 있다. 미스 반데어로에의 한국인 제자가 디자인했다. 그런 거리에서 우주선 같은 디자인으로 홀로 튀는 종로타워(1999)는 건축가들을 상대로 한 설문에서 ‘최악의 건축물’에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건물 꼭대기에 공중에 붕 뜨다시피 한 레스토랑 공간을 정말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 같다. 비교적 최근에 지은 새문안교회(2019)도 곡선이 유려하게 뻗어나간 형태로 눈에 띄는데, 눈길을 조금만 돌리면 같은 건물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교차하는 직선으로만 가득한 측면을 볼 수 있다.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 가능한 건 역시 직선적인 공간이 교회의 사무 등 기능엔 최적이란 믿음이 있어서다. 그 맞은편 흥국생명 사옥 앞의 움직이는 조각상 ‘해머링 맨’은 이 거리에서 사람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구조물이 아닐까? 왜 그런 감정을 건물에서는 느낄 수 없게 됐을까? 이 거리에서 거의 유일한 근대건축물 일민미술관(1926) 외벽의 섬세한 요소들을 보면 원래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겨우 한 세기 남짓한 시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난해 가을, 헤더윅은 한국에서의 첫 전시회 ‘헤더윅 스튜디오: 감성을 빚다’를 열었다. 전시회가 열린 ‘문화역서울284’는 옛 서울역사로, 일제강점기 경성역을 복원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건물이다. 이 건물 2층엔 ‘복원전시실’이란 공간이 있다. 헤더윅의 건축 세계를 둘러본 다음 이 무료 전시실에 잠깐 들렀다가 이 건물이 경성역이던 시절 사용한 문고리를 만났다. 새의 깃털이나 소라의 껍데기 같은 모양으로 빚은 문고리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원래 문고리 하나도 허투루 만들지 않았던 거다. 문고리 형태가 지금처럼 심심하고 재미없어진 시간은 과연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될까? 헤더윅은 이성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억압했을지 모를 건축과 도시의 인간성에 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