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기반 달라…‘12·3 비상계엄’ 인식 극과 극 치달아
탄핵·분당 트라우마에 갈라서기 쉽잖아…주도권 각축 예상
[주간경향] “탄핵 트라우마가 나타나고 있다.”
한 친한계(친한동훈계) 의원 측이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여당인 국민의힘의 내부 분위기를 전하면서 한 말이다. 2016년 겨울과 2017년 봄에 걸쳐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새누리당 분열→문재인 대통령 당선’이라는 여당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하게 되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는 셈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또 “심지어 민주당이 향후 20년을 집권하게 된다는 억측이 당 내부에서 떠돌고 있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을 비판하거나, ‘내각 총사퇴’라는 무정부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이냐는 합리적 주장보다, 또다시 8년 전 탄핵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본질 회피적 주장이 당 안팎 분위기를 좌우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 친윤계(친윤석열계) 의원으로 꼽히는 김민전 최고위원은 지난 12월 5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민주당이 얼마나 무도하게 굴고 있는지 제대로 알리지 못해서 계엄이 발생했다”며 울먹였다. 친윤계가 윤 대통령에게 직접 향하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국민의힘은 어떻게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바람을 잡고 있다는 기류가 읽힌다.
친한계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한동훈 대표는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곧바로 ‘위헌’임을 선언했고, 국회 본회의장으로 달려갔다.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에는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계엄 선포는 그 효과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또 친윤계의 반발로 관철되지는 못했지만 지난 12월 4일 윤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기도 했다. 친한계 조경태 의원은 지난 12월 4일 비상 의총이 끝난 후 취재진에게 “국민의힘 의원 70%가 윤 대통령의 탈당을 반대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 대표에 배신자 프레임 씌우기 힘들 것
지난 12월 3일 밤과 4일 새벽 사이에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간 한 대표와 친한계 의원에 대해 친윤계는 ‘배신자 프레임’을 꺼냈다. 여당 대표라면 무엇보다 당론을 모은 뒤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야 하는데 친한계만 본회의장에서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에 찬성을 했다는 것이다. 12월 4일 국민의힘 친한계 의원 국회의원실에는 항의전화가 쏟아졌다. 계엄 해제 결의안에 왜 찬성했냐는 비난부터 윤 대통령을 왜 배신하느냐, 한 대표가 왜 본회의장에서 이재명 대표와 악수를 하느냐 등의 비난이 이어졌다고 한다. 다른 친한계 인사는 “계엄 선포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보다 한 대표가 이 대표와 악수를 하는 사진이 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한 대표를 비판하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배신자로 몰린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언급했다. 영남을 중심으로 한 보수 측의 분위기 일부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계엄 사태 이전에는 윤 대통령에 대해서 영남 보수가 애정이라도 있었겠지만,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면서 “영남에 뿌리가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달리 영남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윤 대통령을 놓고 한 대표에게 배신자 프레임을 씌우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영남을 중심으로 한 친윤계 세력과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한 친한계 세력의 극명한 정세 인식 차이를 지적한다. 홍형식 한길리서치소장은 “한 대표는 영남에 연고도 없을 뿐더러 강남에서 크고 자란 강남 스타일”이라면서 “오랫동안 유교적 보수 인식이 뿌리내린 영남의 보수 스타일과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영남 보수가 공동체적 집단적 보수 의식이 강하다면, 강남 보수는 자유주의적·개인주의적 의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홍 소장은 “지난 7월 전당대회에서 영남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상대하라며 한 대표를 밀어준 것이라 지금과 같은 계엄 사태 이후에도 한 대표가 계속 여권의 본류인 영남을 설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친한계 인사는 “지금 친윤계의 인식은 영남 지역의 60~70대 인식과 다르지 않다”며 “이는 비상계엄을 군사독재 시대의 유물로 인식하는 대다수 국민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12월 4일 비상 의원총회에서는 한 친윤계 의원이 “윤 대통령이 고독한데 우리가 말벗이라도 해줘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알려졌다. 추경호 원내대표의 지시에 따라 국회가 아닌 여의도 당사에 모인 의원들과 한 대표의 메시지를 받고 국회 본회의장으로 들어간 의원들은 현실 인식이 극과 극처럼 다르다. 친윤계 영남 의원 측 인사는 “친한계와 친윤계의 정치적 기반이 서로 다름을 ‘12·3 비상계엄 사태’가 일깨워줬다”면서 “친한계가 나가든 친윤계가 나가든, 이러다간 2017년처럼 당이 쪼개지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우려했다.
김건희 특검안이 두 세력 사이에 민감한 현안
전문가들은 여론의 향방을 주시하고 있다. 현재 이 대표를 이길 수 있는 보수 측 차기 대권주자에게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홍 소장은 “이 대표를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이 대표와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차기 대권주자에게 여권 권력이 쏠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면 앞으로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현재 이 대표와 맞설 수밖에 없는 한 대표에게 자연적으로 힘이 주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엄 소장은 “이번 계엄 사태 이후 단기적으로는 한 대표가 힘을 얻을 것”이라면서 “영남을 비롯한 보수 세력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윤 대통령과 ‘헤어질 결심’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탄핵 트라우마’는 일단 친윤계와 친한계 사이에 ‘탄핵 반대’라는 교집합을 만들어줬다. 한 대표는 12월 5일 윤 대통령 탄핵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전 의원)는 “탄핵으로 가면 분열된다는 탄핵 트라우마가 여당에 드리우고 있다”면서 “탄핵하지 않고 윤 대통령이 갖고 있던 여권 권력을 누가 승계받을 것인지 물밑에서 각축을 벌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표는 탄핵에 반대하면서도 윤 대통령의 탈당은 재요구했다. 친한계와 친윤계 사이에는 탈당이라는 전선이 그어진 것이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안도 두 세력 사이에 민감한 현안이다. 홍 소장은 “한 대표는 무엇보다 윤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충격을 완화하고, 야당이 문제 삼는 김건희 여사 특검을 고리로 여권 권력을 순탄하게 물려받으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표에게 지금은 보수 세력과 당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탄핵 트라우마와 분당 트라우마 때문에 여당이 쉽게 분당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엄 소장은 “탈당하는 쪽이 패한다는 보수 정당의 역사 때문에 누구도 탈당하지 않고 내부에서 권력을 차지하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